3. 우리 통신사(通信使) 황윤길(黃允吉) 등이 일본(日本)에 다녀옴
辛卯春 通信使黃允吉⋅金誠一等 回自日本 倭人平調信⋅玄蘇偕來.
初允吉等 上年四月二十九日 自釜山浦乘船 抵對馬島 留一月 又自馬島 水行四十餘里 到一岐島 歷博多州⋅長門州⋅浪古耶 至七月二十二日 始至國都. 蓋倭人 故迂回其路 且處處留滯 故累月乃至.
其在對馬島 平義智請使臣 宴山寺中 使臣已在座 義智乘轎入門 至階方下. 金誠一怒曰「對馬島 乃我藩臣 使臣奉命至 豈敢慢侮如此? 吾不可受宴」卽起出 許筬等繼出.
義智歸咎於擔轎者殺之 奉其首來謝. 自是倭人 敬憚誠一 待之加禮 望見下馬.
到其國 館於大刹 適平秀吉往擊東山道 留數月 秀吉回 又託以修治宮室 不卽受國書 前後留館五月 始傳命
其國尊其天皇 自秀吉以下 皆以臣禮處之. 秀吉在國中不稱王 但稱關白 或稱博陵侯 所謂關白者 取霍光凡事皆先關白之語 而稱之也.
其接我使也 許乘轎入其宮 以笳角前導 陞堂行禮. 秀吉容貌矮陋 面色黧黑 無異表 但微覺目光閃閃射人云. 設三重席 南向地坐 戴紗帽穿黑袍 諸臣數人列坐 引我使就席.
不設宴具 前置一卓 中有熟餠一器 以瓦甌行酒 酒亦濁 其禮極簡 數巡而罷 無拜揖酬酢之節
有頃 秀吉忽起入內 在席自皆不動. 俄而 有人便服 抱小兒從內出 徘徊堂中 視之 乃秀吉也 座中俯伏而已. 已而出臨楹外 招我國樂工 盛奏衆樂 而聽之. 小兒有溺衣上 秀吉笑呼侍者 一女倭應聲走出 授其兒 更他衣 皆肆意自得 傍若無人.
使臣辭出 其後不得再見 與上副使銀四百兩 書狀通事以下有差.
我使將回 不時裁答書令先行. 誠一曰「吾爲使臣 奉國書來 若無報書 與委命於草莽同.」允吉懼見留 遽發至界濱 待之 答書始來 而辭意悖慢 非我所望也. 誠一不受 改定數次 然後行 凡所經由 諸倭贈遺 誠一皆卻之.
允吉還泊釜山 馳啓情形 以爲必有兵禍. 旣復命 上引見而問之 允吉對如前 誠一曰「臣不見其有是」因言允吉搖動人心 非宣
於是議者 或主允吉 或主誠一. 余問誠一曰「君言與黃使不同 萬一有兵 將奈何?」曰「吾亦豈能必倭終不動? 但黃言太重 中外驚惑 故解之耳.」
신묘년(宣祖 24년 : 서기 1591) 봄에 통신사(通信使) 황윤길(黃允吉)⋅김성일(金誠一) 등이 日本에서 돌아왔는데, 왜인(倭人) 평조신(平調信), 현소(玄蘇)가 함께 따라 왔다.
이보다 먼저 황윤길 등이 지난해(1590) 4월 29일에 부산포(釜山浦)*1)로부터 배를 타고 출발하여 대마도(對馬島)에 이르러 한 달 동안을 머무르고, 또 대마도로부터 뱃길로 40여 리를 가서 일기도(一岐島)에 이르고, 박다주(博多州)⋅장문주(長門州)⋅낭고야(浪古邪)*2)를 거쳐 7월 22일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 국도(國都)*3)에 도착하였다. 대개 倭人들이 고의로 그 길을 멀리 돌고 또 곳곳에 머물러 지체케 한 까닭으로 여러 달 만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들이 대마도에 머물러 있을 때 평의지(平義智)가 사신을 청하여 절간[山寺]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사신들이 이미 자리에 앉아 있는데, 平義智가 교자(轎子)를 탄 채로 문 안으로 들어와 섬돌에 이르러서야 내렸다. 이를 본 김성일이 노하여 말하기를, "대마도는 곧 우리나라의 번신(藩臣)*4)이다. 사신인 우리가 왕명을 받들고 왔는데, 어찌 감히 오만하게 업신여김이 이와 같으냐? 나는 이런 잔치는 받을 수 없다." 하고는 곧 일어나서 나오니 허성(許筬) 등도 잇따라 나와 버렸다.
그러자 平義智는 그 허물을 교자를 메고 온 사람에게 돌려 그 사람을 죽여서 그 머리를 받들고 와서 사과하였다. 이로부터 倭人들은
김성일을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그를 대접함에 예를 더 극진히 하며 멀리 바라보이기만 해도 말에서 내렸다.
우리 사신들이 그 나라의 국도에 이르니 큰 절에 묵게 하였다. 때마침 평수길(平秀吉 : 豐臣秀吉)이 동산도(東山道)를 치러 갔으므로[出戰] 두어 달 동안 머물러 있었는데,平秀吉이가 돌아오고도 또 궁실(宮室)을 수리한다는 핑계로 즉시 국서(國書)를 받지 않아서 전후 다섯 달 동안이나 머물러 있다가 비로소 왕명을 전달하였다.
그 나라에서는 천황(天皇)*5)을 매우 높여서 平秀吉로부터 이하의 모든 관리가 다 신하의 예로써 이에 처하였고, 平秀吉은 나라 안에 있을 땐 왕이라 칭하지 않고 다만 관백(關白)*6)이라고 칭하였고, 혹은 박륙후(博陸候)*7)라고 칭하였다. 이른바 관백이라는 말은 곽광(霍光)*8)이 말한, "모든 일은 다 먼저 자기에게 관백하라[凡事皆先關白]"는 말에서 따온 것이다.
平秀吉은 우리 사신을 접대할 때에 교자를 타고 그 궁(宮)으로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였으며, 날라리[笳 : 갈잎피리 가]와 피리[角 : 뿔피리 각]를 불며 앞에서 인도하여 당(堂)에 올라서 예(禮)를 행하게 하였다. 平秀吉은 얼굴은 작고 누추하고 낯빛은 검으며 보통 사람과 다른 의표는 없었으나, 다만 눈빛이 좀 번쩍거려 사람을 쏘아보는 것같이 느껴졌다고 한다. 그는 삼중석(三重席)을 깔고 남쪽을 향하여 마루에 앉았고, 사모(紗帽)를 쓰고 검은 도포를 입었으며 신하들 몇 사람이 옆에 벌려 앉았다가 우리 사신을 인도하여 자리에 앉게 하였다.
자리에는 연회의 기구도 설비하지 않았고 앞에는 한 개의 탁자가 놓였는데, 그 가운데에 떡 한 그릇이 놓여 있었으며, 질그릇 사발로써 술을 따랐는데 술 역시 탁주(濁酒)였으며, 그 예(禮)가 극히 간단하여 두어 번 술잔을 돌리고는 그만두니, 절[拜]하고 읍(揖)하고 술잔을 주고 받고 하는 절차가 없었다.
잠시 후에 平秀吉은 갑자기 일어나서 집안으로 들어갔는데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은 모두 움직이지 않았다. 조금 뒤에 한 사람이 편복(便服)*9)으로 어린애를 안고 집안으로부터 나와서 집안을 배회하므로 이를 바라보니 곧 平秀吉이었다. 이때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엎드려 있을 따름이었다. 이윽고 난간 밖에 나와서 우리나라 악공(樂工)을 불러 여러 가지 풍악을 성대히 연주하게 하고 이를 듣고 있는데, 안고 있던 어린애가 그 옷에 오줌을 누었다. 平秀吉은 웃으면서 시자(侍子)를 부르니 한 여왜인(女倭人) 여자가 그 소리에 응하여 달려 나왔다. 平秀吉은 그녀에게 아이를 건네주고는 다른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의 모든 행동은 제멋대로였으며 마치 그 곁에는 사람이 없는 것 같은 태도였다.
우리 사신들이 하직하고 나온 후에는 다시 平秀吉을 볼 수 없었는데, 상사(上使)와 부사(副使)에게는 선물로 은(銀) 4백냥을 주고, 서장관(書狀官)⋅통사(通事) 이하 수행원에게는 은을 차등을 두어 주었다.
우리 사신이 장차 돌아오려 할 때, 곧 답서를 마련하지 않고 먼저 떠나라고 하였다. 김성일이 말하기를, "우리는 사신이 되어 국서(國書)를 받들고 왔는데, 만약 회보하는 글이 없다면 이것은 왕명을 풀밭[초망(草莽)=초야(草野)]에 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황윤길은 더 머물라는 말이 나올까 두려워 갑자기 떠나 배가 머물러 있는 바닷가에 이르러 기다리고 있으니 그제야 답서가 왔다. 그러나 그 글 내용이 거칠고 거만하여 우리가 바라던 것이 아니었다. 김성일은 이를 받지 않고 몇 차례를 고쳐 써오게 한 연후에야 가지고 떠났다. 사신이 지나는 곳마다 여러 倭人들이 선물을 주었으나 김성일은 이를 모두 물리쳤다.
황윤길은 부산으로 돌아오자 급히 장계를 올려 倭國의 정세를 보고하고, "반드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사신이 서울에 와서 복명(復命)할 때 임금께서는 그들을 불러 보시고 日本의 사정을 물으셨다. 황윤길은 먼저 보고한 대로 대답하였는데, 김성일은 말하기를, "신은 그곳에서 그러한 징조[兵禍]가 있는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라고 하며, 인하여 "황윤길이 사람들의 마음을 동요시키는 행동은 옳지 않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의논하는 사람들은 혹은 황윤길의 의견을 주장하고, 혹은 김성일의 의견을 주장하였다. 이때 나는 김성일에게 묻기를, "그대의 말은 황사(黃使 : 황윤길)의 말과 같지 않은데, 만일 병화(兵禍 : 戰爭)가 있으면 장차 어떻게 하려는가?" 하니 그는 말하기를, "나도 역시 어찌 왜(倭)가 끝내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을 하겠습니까? 다만 황사의 말이 너무 중대하여 중앙이나 지방이 놀라고 당황할 것 같으므로 이를 해명하였을 따름입니다."라고 하였다.
*1)부산포(釜山浦) : 지금의 부산(釜山).
*2)일기도(一岐島)⋅박다주(博多州)⋅장문주(長門州)⋅낭고야(浪古邪) : 日本에 있는 지명.
*3)국도(國都) : 당시 日本의 수도로 지금의 경도(京都).
*4)번신(藩臣) : 번병(藩屛)의 신하라는 뜻. 대마도는 世宗 때 삼포(三浦)를 개항한 뒤부터 朝鮮에 세공을 바쳤으므로 이렇게 말함.
*5)천황(天皇) : 日本의 임금.
*6)관백(關白) : 日本의 막부시대(幕府時代)의 벼슬 이름. 태정대신(太正大臣)의 윗자리에 있어 실제적인 집권자. 등원시대(藤原時代)부터 시작되어 명치유신(明治維新) 때 폐지되었으나, 어원은 한서 ≪곽광전(霍光傳)≫의 '凡事皆先關白光, 然後奉御天子(모든 일은 다 먼저 곽광에게 관백한 연후에 천자에게 아뢴다)' 하는 데서 따온 말임.
*7)박륙후(博陸候) : 한(漢)나라 때 곽광(霍光)에게 봉한 작명.
*8)곽광(霍光) : 전한(前漢) 때 사람. 소제(昭帝, 前漢, 제8대 황제, 재위 기원전 94∼기원전 87-기원전 74) 때 대사마대장군(大司馬大將軍)이 되어 정사를 돕고, 이어 선제(宣帝, 前漢, 제10대 황제, 재위 기원전 91∼기원전 73-기원전 48)를 섬겨 20여 년 동안 궁중을 마음대로 출입함. 기린각공신(麒麟閣功臣)의 제1인자라고 칭함.
*9)편복(便服) : 평상시에 입는 옷.
辛卯春 通信使黃允吉⋅金誠一等 回自日本 倭人平調信⋅玄蘇偕來.
初允吉等 上年四月二十九日 自釜山浦乘船 抵對馬島 留一月 又自馬島 水行四十餘里 到一岐島 歷博多州⋅長門州⋅浪古耶 至七月二十二日 始至國都. 蓋倭人 故迂回其路 且處處留滯 故累月乃至.
其在對馬島 平義智請使臣 宴山寺中 使臣已在座 義智乘轎入門 至階方下. 金誠一怒曰「對馬島 乃我藩臣 使臣奉命至 豈敢慢侮如此? 吾不可受宴」卽起出 許筬等繼出.
義智歸咎於擔轎者殺之 奉其首來謝. 自是倭人 敬憚誠一 待之加禮 望見下馬.
到其國 館於大刹 適平秀吉往擊東山道 留數月 秀吉回 又託以修治宮室 不卽受國書 前後留館五月 始傳命
其國尊其天皇 自秀吉以下 皆以臣禮處之. 秀吉在國中不稱王 但稱關白 或稱博陵侯 所謂關白者 取霍光凡事皆先關白之語 而稱之也.
其接我使也 許乘轎入其宮 以笳角前導 陞堂行禮. 秀吉容貌矮陋 面色黧黑 無異表 但微覺目光閃閃射人云. 設三重席 南向地坐 戴紗帽穿黑袍 諸臣數人列坐 引我使就席.
不設宴具 前置一卓 中有熟餠一器 以瓦甌行酒 酒亦濁 其禮極簡 數巡而罷 無拜揖酬酢之節
有頃 秀吉忽起入內 在席自皆不動. 俄而 有人便服 抱小兒從內出 徘徊堂中 視之 乃秀吉也 座中俯伏而已. 已而出臨楹外 招我國樂工 盛奏衆樂 而聽之. 小兒有溺衣上 秀吉笑呼侍者 一女倭應聲走出 授其兒 更他衣 皆肆意自得 傍若無人.
使臣辭出 其後不得再見 與上副使銀四百兩 書狀通事以下有差.
我使將回 不時裁答書令先行. 誠一曰「吾爲使臣 奉國書來 若無報書 與委命於草莽同.」允吉懼見留 遽發至界濱 待之 答書始來 而辭意悖慢 非我所望也. 誠一不受 改定數次 然後行 凡所經由 諸倭贈遺 誠一皆卻之.
允吉還泊釜山 馳啓情形 以爲必有兵禍. 旣復命 上引見而問之 允吉對如前 誠一曰「臣不見其有是」因言允吉搖動人心 非宣
於是議者 或主允吉 或主誠一. 余問誠一曰「君言與黃使不同 萬一有兵 將奈何?」曰「吾亦豈能必倭終不動? 但黃言太重 中外驚惑 故解之耳.」
신묘년(宣祖 24년 : 서기 1591) 봄에 통신사(通信使) 황윤길(黃允吉)⋅김성일(金誠一) 등이 日本에서 돌아왔는데, 왜인(倭人) 평조신(平調信), 현소(玄蘇)가 함께 따라 왔다.
이보다 먼저 황윤길 등이 지난해(1590) 4월 29일에 부산포(釜山浦)*1)로부터 배를 타고 출발하여 대마도(對馬島)에 이르러 한 달 동안을 머무르고, 또 대마도로부터 뱃길로 40여 리를 가서 일기도(一岐島)에 이르고, 박다주(博多州)⋅장문주(長門州)⋅낭고야(浪古邪)*2)를 거쳐 7월 22일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 국도(國都)*3)에 도착하였다. 대개 倭人들이 고의로 그 길을 멀리 돌고 또 곳곳에 머물러 지체케 한 까닭으로 여러 달 만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들이 대마도에 머물러 있을 때 평의지(平義智)가 사신을 청하여 절간[山寺]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사신들이 이미 자리에 앉아 있는데, 平義智가 교자(轎子)를 탄 채로 문 안으로 들어와 섬돌에 이르러서야 내렸다. 이를 본 김성일이 노하여 말하기를, "대마도는 곧 우리나라의 번신(藩臣)*4)이다. 사신인 우리가 왕명을 받들고 왔는데, 어찌 감히 오만하게 업신여김이 이와 같으냐? 나는 이런 잔치는 받을 수 없다." 하고는 곧 일어나서 나오니 허성(許筬) 등도 잇따라 나와 버렸다.
그러자 平義智는 그 허물을 교자를 메고 온 사람에게 돌려 그 사람을 죽여서 그 머리를 받들고 와서 사과하였다. 이로부터 倭人들은
김성일을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그를 대접함에 예를 더 극진히 하며 멀리 바라보이기만 해도 말에서 내렸다.
우리 사신들이 그 나라의 국도에 이르니 큰 절에 묵게 하였다. 때마침 평수길(平秀吉 : 豐臣秀吉)이 동산도(東山道)를 치러 갔으므로[出戰] 두어 달 동안 머물러 있었는데,平秀吉이가 돌아오고도 또 궁실(宮室)을 수리한다는 핑계로 즉시 국서(國書)를 받지 않아서 전후 다섯 달 동안이나 머물러 있다가 비로소 왕명을 전달하였다.
그 나라에서는 천황(天皇)*5)을 매우 높여서 平秀吉로부터 이하의 모든 관리가 다 신하의 예로써 이에 처하였고, 平秀吉은 나라 안에 있을 땐 왕이라 칭하지 않고 다만 관백(關白)*6)이라고 칭하였고, 혹은 박륙후(博陸候)*7)라고 칭하였다. 이른바 관백이라는 말은 곽광(霍光)*8)이 말한, "모든 일은 다 먼저 자기에게 관백하라[凡事皆先關白]"는 말에서 따온 것이다.
平秀吉은 우리 사신을 접대할 때에 교자를 타고 그 궁(宮)으로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였으며, 날라리[笳 : 갈잎피리 가]와 피리[角 : 뿔피리 각]를 불며 앞에서 인도하여 당(堂)에 올라서 예(禮)를 행하게 하였다. 平秀吉은 얼굴은 작고 누추하고 낯빛은 검으며 보통 사람과 다른 의표는 없었으나, 다만 눈빛이 좀 번쩍거려 사람을 쏘아보는 것같이 느껴졌다고 한다. 그는 삼중석(三重席)을 깔고 남쪽을 향하여 마루에 앉았고, 사모(紗帽)를 쓰고 검은 도포를 입었으며 신하들 몇 사람이 옆에 벌려 앉았다가 우리 사신을 인도하여 자리에 앉게 하였다.
자리에는 연회의 기구도 설비하지 않았고 앞에는 한 개의 탁자가 놓였는데, 그 가운데에 떡 한 그릇이 놓여 있었으며, 질그릇 사발로써 술을 따랐는데 술 역시 탁주(濁酒)였으며, 그 예(禮)가 극히 간단하여 두어 번 술잔을 돌리고는 그만두니, 절[拜]하고 읍(揖)하고 술잔을 주고 받고 하는 절차가 없었다.
잠시 후에 平秀吉은 갑자기 일어나서 집안으로 들어갔는데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은 모두 움직이지 않았다. 조금 뒤에 한 사람이 편복(便服)*9)으로 어린애를 안고 집안으로부터 나와서 집안을 배회하므로 이를 바라보니 곧 平秀吉이었다. 이때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엎드려 있을 따름이었다. 이윽고 난간 밖에 나와서 우리나라 악공(樂工)을 불러 여러 가지 풍악을 성대히 연주하게 하고 이를 듣고 있는데, 안고 있던 어린애가 그 옷에 오줌을 누었다. 平秀吉은 웃으면서 시자(侍子)를 부르니 한 여왜인(女倭人) 여자가 그 소리에 응하여 달려 나왔다. 平秀吉은 그녀에게 아이를 건네주고는 다른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의 모든 행동은 제멋대로였으며 마치 그 곁에는 사람이 없는 것 같은 태도였다.
우리 사신들이 하직하고 나온 후에는 다시 平秀吉을 볼 수 없었는데, 상사(上使)와 부사(副使)에게는 선물로 은(銀) 4백냥을 주고, 서장관(書狀官)⋅통사(通事) 이하 수행원에게는 은을 차등을 두어 주었다.
우리 사신이 장차 돌아오려 할 때, 곧 답서를 마련하지 않고 먼저 떠나라고 하였다. 김성일이 말하기를, "우리는 사신이 되어 국서(國書)를 받들고 왔는데, 만약 회보하는 글이 없다면 이것은 왕명을 풀밭[초망(草莽)=초야(草野)]에 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황윤길은 더 머물라는 말이 나올까 두려워 갑자기 떠나 배가 머물러 있는 바닷가에 이르러 기다리고 있으니 그제야 답서가 왔다. 그러나 그 글 내용이 거칠고 거만하여 우리가 바라던 것이 아니었다. 김성일은 이를 받지 않고 몇 차례를 고쳐 써오게 한 연후에야 가지고 떠났다. 사신이 지나는 곳마다 여러 倭人들이 선물을 주었으나 김성일은 이를 모두 물리쳤다.
황윤길은 부산으로 돌아오자 급히 장계를 올려 倭國의 정세를 보고하고, "반드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사신이 서울에 와서 복명(復命)할 때 임금께서는 그들을 불러 보시고 日本의 사정을 물으셨다. 황윤길은 먼저 보고한 대로 대답하였는데, 김성일은 말하기를, "신은 그곳에서 그러한 징조[兵禍]가 있는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라고 하며, 인하여 "황윤길이 사람들의 마음을 동요시키는 행동은 옳지 않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의논하는 사람들은 혹은 황윤길의 의견을 주장하고, 혹은 김성일의 의견을 주장하였다. 이때 나는 김성일에게 묻기를, "그대의 말은 황사(黃使 : 황윤길)의 말과 같지 않은데, 만일 병화(兵禍 : 戰爭)가 있으면 장차 어떻게 하려는가?" 하니 그는 말하기를, "나도 역시 어찌 왜(倭)가 끝내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을 하겠습니까? 다만 황사의 말이 너무 중대하여 중앙이나 지방이 놀라고 당황할 것 같으므로 이를 해명하였을 따름입니다."라고 하였다.
*1)부산포(釜山浦) : 지금의 부산(釜山).
*2)일기도(一岐島)⋅박다주(博多州)⋅장문주(長門州)⋅낭고야(浪古邪) : 日本에 있는 지명.
*3)국도(國都) : 당시 日本의 수도로 지금의 경도(京都).
*4)번신(藩臣) : 번병(藩屛)의 신하라는 뜻. 대마도는 世宗 때 삼포(三浦)를 개항한 뒤부터 朝鮮에 세공을 바쳤으므로 이렇게 말함.
*5)천황(天皇) : 日本의 임금.
*6)관백(關白) : 日本의 막부시대(幕府時代)의 벼슬 이름. 태정대신(太正大臣)의 윗자리에 있어 실제적인 집권자. 등원시대(藤原時代)부터 시작되어 명치유신(明治維新) 때 폐지되었으나, 어원은 한서 ≪곽광전(霍光傳)≫의 '凡事皆先關白光, 然後奉御天子(모든 일은 다 먼저 곽광에게 관백한 연후에 천자에게 아뢴다)' 하는 데서 따온 말임.
*7)박륙후(博陸候) : 한(漢)나라 때 곽광(霍光)에게 봉한 작명.
*8)곽광(霍光) : 전한(前漢) 때 사람. 소제(昭帝, 前漢, 제8대 황제, 재위 기원전 94∼기원전 87-기원전 74) 때 대사마대장군(大司馬大將軍)이 되어 정사를 돕고, 이어 선제(宣帝, 前漢, 제10대 황제, 재위 기원전 91∼기원전 73-기원전 48)를 섬겨 20여 년 동안 궁중을 마음대로 출입함. 기린각공신(麒麟閣功臣)의 제1인자라고 칭함.
*9)편복(便服) : 평상시에 입는 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