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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1~2)일본국사(日本國使) 귤강광(橘康廣)이 다녀감/~
23/05/01 07:55:27 金鍾國 조회 2098
 
1. 일본국사(日本國使) 귤강광(橘康廣)이 다녀감
萬曆丙戌間 日本國使 橘康光 以其國王平秀吉書來.
始日本國王源氏 立國於洪武初 與我國修隣好 殆二百年. 其初我國亦嘗遣使修慶弔禮 申叔舟以書狀往來 卽其一也. 後叔舟臨卒 成宗問所欲言 叔舟對曰「願國家毋與日本失和.」成廟感其言 命副提學李亨元 書狀官金訢修睦 到對馬島 使臣以風水驚疑得疾 上書言狀 成廟命致書幣於島主而回. 自是不復遣使 每其國信使至 依禮接待而已.
至是平秀吉 代源氏爲王 秀吉者 或云華人 流入倭國 負薪爲生 一日國王出遇於路中 異其爲人 招補軍伍 勇力善鬪 積功至大官 因得權 竟奪源氏 而代之. 或曰「源氏爲他人所弑 秀吉又殺其人 而奪國云.」
用兵平定諸島 域內六十六州 合而爲一 遂有外侵之志. 乃曰「我使每往朝鮮 而朝鮮使不至 是鄙我也」遂使康廣 來求通信 書辭甚倨 有今天下歸朕一握之語. 蓋源氏之亡 已十餘年 諸島倭歲往來我國 而畏其令嚴 不泄故 朝廷不知也.
康廣時年五十餘 容貌傀偉 鬚髮半白 所經館驛 必舍上室 擧止倨傲 與平時倭使絶異 人頗怪之 故事 一路郡邑 凡遇倭使 發境內民夫 執槍夾道 以示軍威 康廣過仁同 睨視執槍者笑曰「汝輩槍竿太短矣.」
到尙州 牧使宋應泂 享之 妓樂成列 康廣見應泂衰白 使譯官語之曰 「老夫數年在干戈中 鬚髮盡白 使君處聲妓之間 百無所憂 而猶爲皓白何裁?」蓋諷之也.
及至 禮曹判書押宴. 酒酣 康廣散胡椒於筵上 技工爭取之 無復倫次. 康廣回所館 歎息語譯曰「汝國亡矣 紀綱已毁 不亡何待?」
及還 朝廷但報其書 辭以水路迷昧 不許遣使. 康廣歸報 秀吉大怒 殺康廣 又滅族 蓋康廣與其兄康年 自源氏時 來朝我國 受職名 其言頗爲我國地 故爲秀吉所害云.
만력(萬曆)*1) 병술년(1586) 무렵에 일본국(日本國) 사신(使臣) 귤강광(橘康廣)이 그 국왕(國王) 평수길(平秀吉)*2)의 서신을 가지고 우리나라에 왔다.
처음에 日本 국왕 원씨(源氏)*3가 나라를 홍무(洪武)*4) 초기에 세우고, 우리나라와 선린 우호[隣好]관계를 맺은 지가 거의 2백 년이 되었다. 그 처음에는 우리나라에서도 역시 사신을 파견하여 경조(慶弔)*5)의 예절을 닦았는데, 신숙주(申叔舟)*6)가 서장관(書狀官)*7)으로 왕래한 것이 곧 그 한가지 예다. 그 뒤 신숙주가 죽음에 임하였을 때, 성종(成宗)*8)께서 "말하고 싶은 것이 있는가?"라고 물으시니, 신숙주는 대답하기를, "원하옵건대, 우리나라는 日本과 평화롭게 지내는 것을 잊지 말도록 하소서."라고 하였다. 成宗께서는 그 말에 감동되어 부제학(副提學)*9) 이형원(李亨元)과 서장관(書狀官) 김흔(金訢)에게 명하여 日本에 가서 화목을 도모하고 오게 하여 대마도(對馬島)*10)에 이르렀는데, 사신들은 풍랑으로 해서 놀라 병을 얻을까 근심하여 글을 올려 그 상황을 보고하니, 成宗께서는 서신과 예물[書幣]을 대마도주[島主]에게 전하고서 돌아오라고 명령하셨다. 이로부터는 다시 사신을 파견하지 않고, 늘 그 나라에서 사신이 올 때마다 예절에 따라서 대접할 따름이었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 平秀吉은 源氏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다. 平秀吉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그는 본래 中國 사람인데 왜국(倭國)*11)으로 떠돌아 들어가 나무를 해다가 팔아 생활을 하였다. 하루는 국왕(國王)*12)이 밖에 나왔다가 그를 길에서 만났는데, 그 사람됨이 남다르므로 불러서 자기 군대에 편입시켰더니, 그는 용감하고 힘이 세어 잘 싸우고 공을 쌓아 대관(大官)에까지 이르고, 인하여 권력을 잡게 되어 마침내 源氏의 자리를 빼앗고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다."라고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源氏가 다른 사람에게 죽음을 당하자, 平秀吉이 또 그 사람을 죽이고 나라를 빼앗았다."라고 하기도 한다.
平秀吉은 병력을 사용하여 여러 섬을 평정하고, 국내의 66주(州)를 통합하여 하나로 만들고는 드디어 다른 나라를 침략하려는 뜻을 가졌다.

그는 말하기를, "우리 사신은 늘 조선(朝鮮)에 가는데도 朝鮮 사신은 오지 않으니, 이는 곧 우리를 업신여기는 것이다."라 하고, 드디어는 橘康廣으로 하여금 우리나라에 와서 통신사(通信使)를 보낼 것을 요구했는데, 그 사신의 언사가 매우 거만하였으니 "이제 천하가 짐(朕)의 한 손아귀에 돌아올 것이다."라는 말까지 했다. 이때는 대개 源氏가 망한지 이미 10여 년이 되었는데, 여러 섬에 사는 왜인(倭人)들이 해마다 우리나라를 왕래하고 있지만, 그 명령의 엄중함을 두려워하여 누설하지 않은 까닭으로 조정에서는 日本의 정세를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橘康廣은 이때 나이가 50여 세로 용모가 장대하고 수염과 머리털이 반백이었다. 그는 지나는 관역(館驛)*13)마다 반드시 좋은 방에서 묵고 행동이 거만하여 여느 때의 倭國 사신과는 아주 다르므로 사람들은 자못 괴상하게 여겼다. 우리나라의 풍습으로 대개 倭國 사신을 맞게 되면 한 길가의 군읍(郡邑)에서는 그 지경 안의 장정을 동원하여 창을 잡고 길가에 늘어서서 군사의 위엄을 보였었는데, 橘康廣은 인동(仁同)*14)을 지나다가 창을 잡고 있는 사람을 흘겨보고는 웃으며 말하기를, "너희들의 창자루는 아주 짧구나."라고 하였다.

그가 상주(尙州)*15)에 이르렀을 때, 목사(牧使)*16) 송응형(宋應泂)이 그를 대접하여 기생들의 음악과 노래와 춤이 어울렸는데, 橘康廣은 송응형이 노쇠하고 백발인 것을 보고 통역관으로 하여금 그에게 말하기를, "이 늙은이는 여러 해 동안 전쟁하는 마당에 있었으므로 수염과 머리털이 다 희어졌지만, 사군(使君)*17)께서는 아름다운 기생들 틈에서 온갖 근심할 것이 없이 지냈겠는데도 오히려 백발이 되었으니 무슨 까닭입니까?"라고 하였다. 이는 대개 그를 풍자한 말이다.

橘康廣이 서울에 이르자, 예조판서(禮曹判書)*18)가 잔치를 베풀고 대접하였다. 술이 취하자 橘康廣이 호초(胡椒)*19)를 자리 위에 헤쳐놓으니 기생과 악공들이 그것을 다투어 줍느라고 좌석의 질서가 걷잡을 수 없는 형편이 되었다. 橘康廣은 객관으로 돌아와서 탄식하며 통역에게 말하기를, "너희 나라는 망하겠다. 기강(紀綱)이 이미 허물어졌으니 망하지 않기를 어찌 기대하겠는가?"라고 하였다.
그가 돌아갈 때 우리 조정에서는 다만 그 서신에 회답하여 <물길에 어두움으로 해서 사신을 파견하는 것은 허락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橘康廣이 돌아가서 보고하니,平秀吉은 크게 노하여 橘康廣을 죽이고, 또 그 일족을 멸망시켰는데, 대개 橘康廣은 그 형 강년(康年)과 함께 源氏 때부터 우리나라에 내조(來朝)하여 직명(職名)을 받았으므로, 그의 말이 자못 우리나라의 처지를 위해서 하였던 까닭으로 平秀吉에게 죽은 바 되었다고 이른다.

*1)만력(萬曆) : 明나라 신종(神宗, 明, 제13대 황제, 재위 1563∼1573-1620) 때의 연호. 병술년은 만력 14년, 곧 우리나라 宣祖 19년(1586)이다.
*2)평수길(平秀吉) : 풍신수길(豊臣秀吉, 1537∼1598)을 말함. 당시 日本 막부(幕府)의 관백(關白)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을 일으킨 원흉.
*3)원씨(源氏) : 실정막부(室町幕府)의 마지막 장군 족리의소(足利義昭)를 가리킴, 또는 직전신장(織田信長)이라고도함.
*4)홍무(洪武) : 명태조(太祖, 明, 초대황제, 재위 1328∼1368-1398) 때의 연호.

*5)경조(慶弔) : 경사(慶事)와 상사(喪事).
*6)신숙주(申叔舟, 1417∼1475) : 조선조 초기의 문신. 자는 범옹(泛翁), 호는 보한재(保閒齋), 시호(諡號)는 문충(文忠). 본관은 고령(高靈). 世宗 때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集賢殿) 부수찬(副修撰)이 되고, 世祖 때 정란공신(靖亂功臣)이 되고 벼슬이 영의정(領議政)에 이름. 世宗 때 서장관(書狀官)으로 日本에 가서 시명(詩名)을 떨치고 대마도주와 계해조약(癸亥條約)을 맺음. 저술에 ≪보한재집(保閒齋集)≫, 일본사행기록(日本使行記錄)인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 등이 있음.
*7)서장관(書狀官) : 외국에 보내는 사신의 한 사람으로, 상사(上使), 부사(副使), 서장관(書狀官)을 삼사(三使)라고 함. 그 직책은 서장 등 문서관계의 일을 맡아봄. 행대어사(行臺御史)를 겸하게 했다.

*8)성종(成宗) : 조선조 제9대 임금. 재위 1457∼1469-1494)
*9)부제학(副提學) : 조선조 때의 관직. 홍문관(弘文館)에 속한 정3품 벼슬로 제학(提學)의 다음, 직제학(直提學)의 윗자리인데 정원은 1명이었다.
*10)대마도(對馬島) : 지명. 우리나라 남단과 日本 九州의 해협에 있는 섬으로, 高麗 말부터 우리나라에 조공을 바치고 우리가 내어주는 곡식을 받아가는 관계에 있었다.
*11)왜국(倭國) : 日本의 옛 이름.
*12)국왕(國王) : 실정막부(室町幕府)의 마지막 장군 족리의소(足利義昭)를 가리킴, 또는 직전신장(織田信長)이라고도함.
*13)관역(館驛) : 역에 마련된 객관.

*14)인동(仁同) : 경상북도(慶尙北道) 칠곡군(漆谷郡)에 있는 지명.
*15)상주(尙州) : 경상북도(慶尙北道) 북서부에 위치한 요지.
*16)목사(牧使) : 조선조 때의 지방 관직. 전국 8도에 두었던 정3품 벼슬로서 각 고을의 으뜸벼슬이었다.
*17)사군(使君) : 나라의 일로 외방에 나와 있거나 나라의 사명을 받들고 있는 관원을 친근하게 이르는 말. 여기서는 목사(牧使)를 지칭함.
*18)예조판서(禮曹判書) : 조선조 때의 관청인 예조(禮曹)의 판서(判書)로 정2품 벼슬.
*19)호초(胡椒) : 열대지방에서 생산되는 향목(香木)의 열매.
 


2. 일본국사(日本國使) 평의지(平義智) 등이 옴
日本國使平義智來 秀吉旣殺橘康廣 令義智來求信使 義智者 其國主兵大將平行長女壻也 爲秀吉腹心.
對馬島太守宗盛長 世守馬島 服事我國 時秀吉去宗氏 使義智代主島務 以我國不諳海道爲辭 拒通信 詐言義智 乃島主子 熟海路 與之偕行. 便欲使我 無辭以拒 因又竅覘我虛實 平調信⋅僧玄蘇等同至
義智年少精悍 他倭皆畏之 俯伏膝行 不敢仰視 久留東平館 必邀我使與俱 朝議依違而已.
數年前 倭寇全羅道損竹島 殺邊將李太原 捕得生口 言我國邊氓沙乙背同者 叛入倭中 導倭爲寇 朝廷憤之. 至是人或言 宜令日本 刷還叛民 然後議通信 以觀誠否 使館客諷之 義智曰「此不難」卽遣平調信 歸報其國 不數月 悉捕我民之在其國者十餘人來獻 上御仁政殿 大陳兵威 鎖沙乙背同等 入庭詰問 斬於城外. 賞義智內廏馬一匹 後引見倭使一行賜宴 義智玄蘇等 皆入殿內 以次進爵.
時余判禮曹 亦宴倭使於曹中 然通信之議久未決. 余爲大提學 將撰國書 啓請速定議 勿致生釁 明日朝講 知事邊協等 亦啓宜遣使報答 且見彼中動靜以來 非失計也.
於是朝議始定 命擇可使者 大臣以僉知黃允吉 司成金誠一爲上副使 典籍許筬爲書狀官.
庚寅三月 遂與義智等同發. 時義智獻二孔雀及鳥銃⋅槍⋅刀等物 命放孔雀於南陽海島 下鳥銃於軍器寺 我國之有鳥銃始此.

일본국사(日本國使) 평의지(平義智)*1)가 우리나라에 왔다. 풍신수길(豐臣秀吉)이 이미 귤강광(橘康廣)을 죽이고 의지(義智)로 하여금 우리나라에 가서 통신사(通信使)*2)를 보내라고 요구하게 했다. 義智란 사람은 그 나라의 주병대장(主兵大將)*3) 평행장(平行長)*4)의 사위[女壻]로서 豐臣秀吉의 심복(心腹)이었다.
대마도(對馬島) 태수(太守) 종성장(宗盛長 : 대마도주를 말함. 그 선대 정성(貞盛) 때부터 우리나라와 무역관계를 맺고 있었다.)은 대대로 대마도를 지키면서 우리나라를 섬겨 왔는데, 이때 豐臣秀吉은 종씨(宗氏)를 제거하고는 의지(義智)로 하여금 대마도의 정무[務]를 대신하게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바닷길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핑계로 해서 통신사(通信使) 보내기를 거절하여 왔었는데, 豐臣秀吉은 거짓으로 말하기를, "義智는 곧 대마도주[馬主]의 아들이므로 바닷길에 익숙하니 그와 함께 오라."고 하여 우리나라로 하여금 핑계로 거절하는 일이 없게 하려고 하였고, 또한 우리나라의 허실(虛實)*5)을 엿보려고 평조신(平調信)*6), 중 현소(玄蘇)*7) 등과 같이 왔다.
義智는 나이가 젊고 정력이 있고 사나와서 다른 倭人들이 다 두려워하였고, 그 앞에서는 엎드려 무릎으로 기며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였다. 義智는 오랫동안 동평관(東平館)*8)에 머물러 있으면서 반드시 우리 사신을 데리고 함께 돌아가겠다고 하였으나, 조정의 의논은 어떻게 결정을 짓지 못하고 머뭇거릴 따름이었다.

몇 해 전에 倭賊이 전라도(全羅道) 고흥군(高興郡)의 손죽도(損竹島)에 쳐들어와서 그곳을 지키던 변장(邊將) 이태원(李太源)을 죽였는데, 그때에 사로잡힌 倭賊이 "우리나라 변방 백성인 사을배동(沙乙背同)이란 자의 무리들이 배반하여 倭國 안으로 들어와 倭人들을 인도해서(길 안내를 한 것) 침구[侵寇, 쳐들어 가다]하게 되었다."고 말하므로 조정에서는 분개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사람들이 혹은 말하기를, "마땅히 日本으로 하여금 배반한 백성들을 조사하여 모두 돌려보내게 하고, 그런 뒤에 통신사 문제에 대하여 의논하여 저들의 성의가 있느냐 없느냐를 보아야 할 것이다."고 하므로, 관객(館客 : 접대를 맡고 있는 관원)으로 하여금 그 뜻을 빗대어(슬며시 떠보다) 말하게 하였더니, 의지는 말하기를, "이는 어렵지 않은일이다."라고 하면서, 곧 平調信으로 하여금 그날로 돌아가 이 사실을 알리게 하였더니, 두어 달이 안 되어 우리나라 백성으로서 그 나라에 가 있는 사람 10여 명을 모두 잡아가지고 와서 바쳤다. 이때 임금께서는 인정전(仁政殿)*9)에 나아가 크게 군사의 위엄을 보이고는 沙乙背同 등을 묶어 뜰 안에 들여놓고 심문한 다음 성 밖에 끌어내어 베어 죽이고, 義智에게는 내구마(內廏馬)*10) 한 필을 상으로 주고, 그런 뒤에 倭國 사신 일행을 인견(引見)하고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이때 義智와 玄蘇 등은 모두 대궐 안으로 들어와서 차례로 왕에게 술잔을 올렸다.

이때 나(이 책을 지은 柳成龍)는 예조판서(禮曹判書)로 있었으므로 역시 倭國 사신을 예조(禮曹)에 불러 잔치를 베풀었으나, 통신사 파견에 대한 의논은 그후 오랫동안 결정을 짓지 못하였다. 그러는 동안 내가 대제학(大提學)*11)이 되어 장차 日本에 보낼 국서(國書)를 지으려 할 때 글을 올려, '이 일을 속히 결정하시어 두 나라 사이에 틈이 생기지 않도록 하소서.' 하고 청했고, 그 다음날 조강(朝講)*12)에서 지사(知事) 변협(邊協)*13) 등도 또한, "마땅히 사신을 파견하여 회답하게 하고, 또 저 나라 안의 동정도 살펴보고 오게 하는 것도 잘못된 계책은 아닐 것입니다."라고 아뢰었다.
이에 조정의 의논은 비로소 결정되었다. 그래서 임금께서는 사신으로 보낼 만한 사람을 선택하라고 명하였는데, 대신(大臣)이 첨지[(僉知 :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의 약칭. 중추부(中樞府)에 속한 2품 당상관(堂上官)] 황윤길(黃允吉)*14)과 사성(司成 : 성균관의 종3품 벼슬) 김성일(金誠一)*15]을 적임자로 아뢰어 상사(上使)와 부사(副使)로 삼고, 전적(典籍 : 성균관의 정6품 벼슬) 허성(許筬)*16)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았다.

이들은 경인년(宣祖 23년 : 서기 1590) 3월에 드디어 平義智 등과 함께 日本으로 떠났다. 이때 平義智는 공작(孔雀) 두 마리와 조총(鳥銃)*17)⋅창⋅칼 등의 물건을 바쳤는데, 왕은 공작은 남양(南陽)의 해도(海島)*18)에 놓아 날려 보내고, 조총은 군기시(軍器寺)*19)에 넣어두라고 명령하셨다. 우리나라가 조총을 가진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1)평의지(平義智) : 종의지(宗義智)를 이름. 대마도주(對馬島主) 종성장(宗盛長)의 7대손으로 도주(島主)가 되었는데, 풍신수길(豐臣秀吉)이 명하여 朝鮮으로 왔었고, 임진왜란 때 소서행장(小西行長)과 함께 선봉으로 쳐들어왔다.
*2)통신사(通信使) : 나라의 명을 받고 다른 나라로 왕래하는 외교사절.
*3)주병대장(主兵大將) : 병마 군권을 주관하고 있는 대장.

*4)평행장(平行長) : 소서행장(小西行長)을 이름. 풍신수길(豐臣秀吉)의 부하. 명장으로 임진왜란 때 가등청정(加籐淸正)과 함께 倭軍 최고 책임자의 한 사람으로 우리나라에 쳐들어와서 온갖 만행을 자행하였다.
*5)허실(虛實) : 허허실실(虛虛實實)의 준말로, 공허와 충실의 뜻.
*6)평조신(平調信) : 유천조신(抑川調信)을 이름. 임진왜란 직전에 豐臣秀吉의 사자 종의지(宗義智)가 올 때 현소(玄蘇)와 함께 우리나라에 와서 허실을 살펴보고 갔으며, 난중에는 倭將의 막하에서 계략을 꾸민 자.

*7)현소(玄蘇) : 임진왜란 때 중의 탈을 쓴 倭의 앞잡이.
*8)동평관(東平館) : 倭國 사신이 머무르던 숙소.
*9)인정전(仁政殿) : 창덕궁(昌德宮)의 정전(正殿).
*10)내구마(內廏馬) : 임금이 타는 수레와 말 등을 관장하는 내사복시(內司僕寺)에서 기르는 말.

*11)대제학(大提學) : 조선조 때 관직. 홍문관(弘文館)과 예문관(藝文館)에 속한 정2품 벼슬.
*12)조강(朝講) : 아침에 경연관(經筵官)이 왕에게 <경전(經傳)>을 강의하는 것.
*13)변협(邊協, 1528∼1590) : 조선조 宣祖 때의 장군. 자는 화중(和中), 호는 남호(南湖), 본관은 원주(原州), 시호는 양정(襄靖)이다. 무과에 급제하고, 벼슬이 공조판서(工曹判書) 겸 도총관(都摠管), 포도대장(捕盜大將)에 이름.
*14)황윤길(黃允吉, 1536∼?) : 조선조 宣祖 때의 문관. 자는 길재(吉哉), 호는 우송당(右松堂), 본관은 장수(長水). 황희(黃喜)의 5대손. 明宗 때 문과에 급제. 宣祖 때 통신정사로 日本에 다녀와서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라고 보고함. 벼슬이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이름.

*15)김성일(金域一, 1538∼1593):조선조 宣祖 때 문신.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峯), 본관은 의성(義城),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宣祖 때 문과에 급제, 장령(掌令), 부제학(副提學)을 지냄. 宣祖 23년(1590) 황윤길과 함께 통신부사로 日本에 다녀와서 병화가 없을 것이라고 보고하여 말썽이 일어남. 임진왜란 때 순찰사(巡察使)를 지냄. 저서에 ≪학봉집(鶴峯集)≫, ≪상례고증(喪禮考證)≫, ≪해사록(海槎錄)≫이 있다.
*16)허성(許筬, 1548∼1612) : 조선조 宣祖 때의 문신. 자는 공언(功彦), 호는 악록(岳麓)⋅산전(山前), 본관은 양천(陽川). 문과에 급제하여 1590년 통신사의 서장관으로 日本에 다녀왔고, 벼슬이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이름. 저서에 ≪악록집(岳麓集)≫이 있다.

*17)조총(鳥銃) : 무기의 일종으로, 곧 소총. 화승총(火繩銃)의 구칭(舊稱).
*18)남양해도(南陽海島) : 경기도(京畿道) 화성군(華城郡)에 위치한 지명. 곧 남양(南陽)의 여러 섬.
*19)군기시(軍器寺) : 조선조 때의 관청. 병기(兵器)⋅기치(旗幟)⋅융복(戎服)⋅집물(什物) 등 무기를 만드는 일을 맡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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