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비록(懲毖錄)≫
1. 개요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이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懲毖]"는 의도에서 자신이 겪은 임진왜란(壬辰倭亂)의 원인과 7년간의 전황을 자세하게 기록한 책이다. 임진왜란 당시 그는 영의정(領議政)과 도체찰사(都體察使)*1)로 군무와 국정 운영을 총괄하는 최고 책임자였다. 류성룡은 이 책에서 임진왜란을 日本이 朝鮮과 中國을 모두 침략한 동아시아 전쟁으로 파악하였다. 특히 징비록은 근세 일본인들에게 임진왜란을 알려 주는 주요한 사료로 인식되어 많이 인용되었다.
조선 선조(宣祖, 조선 제14대 왕, 재위 1552∼1567-1608) 시기에 영의정과 도체찰사를 지냈던 서애(西厓) 류성룡이 임진왜란 발발 당시인 1592년부터 1598년까지의 전황들을 기록한 수기. ≪난중일기(亂中日記)≫와 함께 임진왜란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묘사한 대표적인 저술 중 하나이다. 영어로는 한국어 발음을 옮긴 Jingbirok이라는 표기와 함께 '징비'를 의역해서 'The Book of Corrections'라고도 쓴다.
2. 내용
'징비록'이라는 이름은 ≪시경(詩經)≫ 소비편(小毖篇)에 적혀 있는 "내가 지난 잘못을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予其懲而毖後患)"는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류성룡은 징비록의 자서에 "난중의 일은 부끄러울 따름이다."라고 적었는데, 스스로 반성한다는 의미에서 이 책을 저술한 것이다.
내용은 전쟁의 배경, 전투 당시의 상황, 朝鮮⋅日本과 明나라간의 외교 관계, 주요 맹장(猛將)에 대한 묘사와 전투 성과, 이후의 백성들의 생활상 등의 임진왜란에 대한 총체적인 기록이다. 저자인 류성룡은 임진왜란 당시 주요 직책을 역임한 덕분에 당시 보고된 문서들을 확보할 수 있었고, 그 자료들을 바탕으로 징비록의 집필을 진행할 수 있었다. 당시 남인(南人)의 일원이었던 류성룡이지만, 징비록에서는 비교적 객관적인 시각을 견지한다.
특히 일관되게 '왜적(倭敵)'이라는 표현만을 쓰기보다도 '일본(日本)'이라는 국호를 동시에 사용함으로써 무분별한 적개심 표현을 자제했을 뿐만 아니라, 전쟁 전의 배경에 대해서도 상세히 설명하여 '미리 살펴 전쟁을 막지 못한 것에 대해 돌이켜 반성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았다.*2) 또한 명군(明軍)의 원조를 중시하면서도 이순신(李舜臣, 1545∼1598)과 朝鮮 관민(官民), 의병의 공로를 특히 강조하며 朝鮮 중심 전쟁 사관을 확립하였다.
≪징비록≫이 저술되기 전까지는 中國과 日本 모두 임진왜란을 자국 중심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전장부터 朝鮮이었고, 朝鮮 역시 엄연히 전쟁의 한 축을 담당했는데도. 明나라의 임진왜란 관련 기록인 ≪양조평양록(兩朝平攘錄)≫에는 "(당시 朝鮮은) 정사가 해이해지고, 간신 류승총(柳承寵)(≒류성룡)과 이덕형(李德馨, 1561∼1613)이 국왕에게 아부하니"(…) 운운하는 기록이 버젓이 남아 있었다.*3) 그뿐만 아니라 日本의 침략 목적에 明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도 굳이 드러내지 않았으며, 어디까지나 朝鮮이 그 자체적인 문제 때문에 日本의 침략을 막지 못했으며, 明은 다만 도의적인 차원에서 朝鮮을 도왔을 뿐이라는 식으로 서술되었다. 朝鮮을 바라보는 이런 왜곡된 시각은 日本에까지 여과 없이 전해졌다. 日本 입장에서는 明이 朝鮮의 상국(上國)이므로 어련히 잘 알고 썼겠거니 해서 의심하지 않았던 것. 이러한 中國과 日本의 임진왜란 관련 시각이 균형감각을 갖추도록 한 종합적 기록이 바로 ≪징비록≫이었다. ≪징비록≫은 日本에 전해진 뒤 淸나라 학자 양수경(楊守敬, 淸, 1839∼1915)에게도 전해져, 현대 中國의 임진왜란 연구에까지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한편, 이순신을 강조한 대목과 관련해서는, 이순신을 천거한 사람이 바로 류성룡 자신이었으므로 그를 일정 부분 띄울 필요성도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애초에 둘은 절친이기도 했고. 물론 그렇다고 이순신의 공이 바래는 것은 아니겠지만.*4) 사실 이 때문인지 조정의 이순신 모함에 휩쓸려 자기도 가세했던(…) 사실을 적지 않았다. 물론 다른 시각으로 보는 주장도 있긴 하지만…후술된 비판 항목 참조.
≪징비록≫의 서술 목적 중 중요한 또 한 가지는, 류성룡 자신이 속한 南人의 반대 당파인 北人의 정치 공세에 의해 자신에게 덧씌워진 '주화오국(主和誤國)'*5)의 오명을 씻는 것이었다. ≪징비록≫에는 류성룡 자신이 明과 日本 사이의 강화에*6) 반대하였다는 내용의 적극적인 자기 변호가 실려 있으며, 이는 대체로 사실이기도 하다. 북인계에 가까운 데다가 의병 활동을 했던 곽재우(郭再祐, 1552∼1617) 역시 전후 日本과의 화의를 주장한 바 있다.
반성도 반성이지만 다른 기록과 함께 자기의 행적과 업적을, 사실을 표현해 두기 위했던 기록이기도 하다. 간첩 김순량(金順良)을 잡은 일이라든가 스스로의 우국충정, 明나라 측 인물들을 상대하느라 겪었던 고충 등을 기록해 두었다. 물론 대부분 '하늘 덕', '전하 덕' 등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이는 당대 사대부들의 의례적인 겸사로 해석된다. ≪징비록≫을 저술함으로써 남긴 전쟁사적 기록 여부를 제외하더라도, 전시재상으로서 류성룡이 남긴 업적은 상당하다.
3. 판본
≪징비록≫은 류성룡 개인이 저술한 초본과, 나중에 인쇄로 간행된 간행본이 남아있는데 간행본은 일부 내용을 수정 추가하고 진실 오류를 바로잡은 것이다.
특히 초본에 남아있는 국왕에 대한 비판적인 사실들은 상당수 수정되었는데 공문서인 실록 기록은 초본 기록에 가깝다. 예컨대 宣祖가 한양(漢陽)을 버리고 몽진할 당시 초본에는 선조가 몽진 의사를 갖고 이를 주도한 것처럼 서술하고 있으나 간행본에서는 그냥 조정 내에서 몽진에 대한 논의가 돌았다고 서술하고 있다. 광해군(光海君, 조선, 제15대 왕, 재위 1575∼1608-1623∼1641)을 세자에 임명하는 과정은 궁중의 비밀스러운 일이라고 여겨 몽땅 삭제. 또한 칠천량해전(漆川梁海戰)의 패전 소식이 전해진 후 이순신 재기용에 대해 초본에는 선조가 中國의 고사를 인용하며 비변사(備邊司)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다가 이항복(李恒福, 1556∼1618) 등이 이순신을 재기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아무 말 없이 나가 버렸다고 적었으나 간행본에서는 신하들이 권하니 선조가 그냥 따랐다고 적고 있다. 원균(元均, 1540∼1597)에 대한 비판도 초본이 훨씬 강도가 높다.
초본과 간행본의 차이를 알 수 있는 한 포스팅 내용. 초본 내에서도 '上欲誅之(임금께서 그를 죽이려고)'라고 썼다가 이를 취소선으로 지우고는 '命(명하여)'으로 고쳐 이어나간 부분이 확인된다고.
4. 해외
≪징비록≫은 이후 日本에 유출되어 큰 인기를 끌었는데*7) 언제 처음 전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1683년의 쓰시마 번주(對馬島 藩主) 서적 재물 조사 목록에 이미 '징비록'이 보이고, 1687년에 간행된 다른 책에서도 ≪징비록≫이 인용된 흔적이 있다. 1693년에는 中國과 韓國 문헌상의 日本 관련 기록을 모은 '이칭일본전(異稱日本傳)'*8)에 징비록의 내용이 일부 인용되었으며, 1695년(숙종 21년)에는 ≪징비록≫ 전체 내용에 朝鮮의 행정 구역표, 조선 지도가 첨부된 ≪조선징비록(朝鮮懲毖錄)≫이 간행되었다. 이 '조선징비록' 출간 사실이, 17년이나 지난 1712년에서야 朝鮮에 알려져 국가 안보 문제가 대두되는 한편, 서적 수출이 금지되고 조일(朝日) 외교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물론 이미 퍼질대로 퍼지기는 했지만. 한편 19세기 말에는 이 일본판 조선징비록이 日本에 체류했던 中國 학자를 통해 淸나라에도 전해졌다고. 동아시아 베스트셀러.
日本에서 간행된 '조선징비록'의 경우, 원서에서 비하적으로 쓰인 '관추(關酋)'가 본래의 관직명인 '관백(關白)'으로 수정된 정도 외에는 원서와 별반 차이가 없다고 한다. 참고로 '추(酋)'는 '두목, 추장' 등의 의미로, 미개한 종족의 우두머리를 의미하는 바, '누르하치(奴兒哈赤, 努爾哈赤)'에 대해서도 朝鮮에서 '노추(奴酋)'라고 쓴 바 있다. 원 저자인 류성룡의 입장에서는 침략의 원흉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해 결코 좋게 좋게 '관백'이라고 제대로 써 주고 싶었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일본판 조선징비록에 일본인 유학자 가이바라 엣켄(貝原益軒)*9)이 쓴 서문에는 "전쟁을 너무 좋아하는 것과 전쟁을 잊는 것 모두 경계해야 한다"면서, "도요토미 가문은 전쟁을 너무 좋아했기에 망했고, 朝鮮은 전쟁을 잊었기에 망할 뻔했다"고 되어 있다.*10) 이어 재상 류성룡이 징비록을 쓴 것이 지당하다는 찬사와 함께 "이 책은 기사가 간결하고 말이 질박하니 과장이 많고 화려함을 다투는 세상의 다른 책들과는 다르다. 朝鮮 정벌을 말하는 자는 이 책을 근거로 삼는 것이 좋다. …(가히) 실록(實錄)이라 할 만하다."고 쓰여 있다.
현대의 일본인들은 임진왜란에 그다지 관심이 없으나 당대 일본인들에겐 대단한 관심거리였고 징비록이 인기를 끌었던 이유도 이와 연관되는데, 이는 비록 실패했지만 임진왜란이 당시 日本에서 몇 안 되는 日本의 대규모 해외 원정 사례였기 때문이었던 듯하다. 마르코 폴로(이탈리아, 1254∼1324)가 동방에 갔다와서 쓴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이 엄청난 인기와 서양인들의 오리엔탈리즘의 형성에 영향을 미친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겠다. 거기에다가 당대의 외교비사들이 가득 실려있기까지 하니 더더욱 흥미진진했을 것이다. 당시 日本에선 ≪징비록≫을 토대로 각종 전쟁 소설들도 만들어졌는데, 자료 부족으로 소설 내 삽화의 조선인들이 중국인 복장을 하고 있다. 한 일본인 작가가 뒤늦게 朝鮮의 민화를 입수하여 그에 맞게 고증을 하기도.
5. 비판
일찍이 임진년의 일을 추기(追記)하여 이름하기를 ≪징비록≫이라 하였는데 세상에 유행되었다. 그러나 식자들은 자기만을 내세우고 남의 공은 덮어버렸다고 하여 이를 기롱(譏弄 : 놀림)하였다.
선조 수정 실록 41권, 선조 40년 5월 1일 계해 2번째 기사 유성룡 졸기 中 일부에선 ≪징비록≫에 정작 무엇을 반성해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 서술이나 저자 자신에 대한 자성의 내용은 부족한 것 아니냔 비판도 한다.
이를테면 류성룡 자신에 대한 반성이 일정 부분 결여되어 있는 점이 대표적인 예. 류성룡은 의외로 우유부단한 면이 좀 있어서, 이순신의 2차 백의종군을 부른 어전회의에서 왕의 원균에 대한 편애와 당시 조정의 분위기에 휩쓸려 이순신 모함에 가담한 일이 있었는데,*11) 가장 반성해야 할 이런 사실에 대해서는 정작 기록이 별반 보이지 않는다. 다만 이것이 이순신을 살리기 위한 교책이었다는 반론도 있는데, 당대에도 류성룡이 이순신과 친밀하다는 사실은 유명했으므로 이순신을 증오한 선조 앞에서 잘못 두둔했다가는 진짜 이순신이 죽을 수도 있었기 때문에 일부러 그랬다는 것. 이후 이순신이 통제사(統制使)로 복귀하자 이전처럼 든든한 후견인이 되어 주었다.
또한 류성룡은 임진왜란 전에 이순신, 권율(權慄, 1537∼1599)과 더불어 원균을 추천하였는데, 원균은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가 되기 전 더 낮은 직위를*12) 받았을 때도 평이 좋지 않아 취소된 상황이었다. 이후 전쟁 기간 동안 원균의 잘못된 전쟁 수행으로 얼마나 심각한 손해가 생겼는지를 생각해 본다면, 사람을 잘못 봐도 한참 잘못 본 것. 이런 인사상의 오점에 대해서도 별다른 기록이 없다. 3명 중 2명은 잘 추천했는데, 잘못 추천한 나머지 1명 때문에 혹평을 받는 건 부당하다는 식의 말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건 조선 정부 입장도 마찬가지다. 조선 정부는 무능했고 민초들이 정부가 싼 똥을 다 치웠다는 통념과 달리, 조정에서는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전쟁준비를 하려고 했고 그것을 비협조로 일관한건 지방 양반들과 백성들이었다. 경상도(慶尙道)에서는 유생들까지 동원하며 열성적으로 전쟁준비를 했던 관리를 지방 양반들이 폭정을 일삼는다며 상소를 올렸고, 전라도(全羅道)에서는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노역을 부과했다는 이유로 민란까지 일어났다. 하지만 조정에서 잘한 점이 있을지라도 못한 부분을 혹평하는 것까지 부당하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고, 이것은 류성룡도 마찬가지다.
한편, 익히 알려져 있듯 1591년 황윤길(黃允吉, 1536∼?)과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이 사신으로 다녀와 왜군(倭軍)의 침략 가능성에 대해 서로 다른 입장을 보일 때, 류성룡은 '침략할 리가 없다'는 김성일 측 의견을 지지했다. 여기까지는 김성일이 나중에 '황윤길의 말이 지나쳐 일부러 반대로 말했다'고 했더라는 식으로 적고 있다. 문제는 히데요시가 보낸 국서 내용*13)을 明나라에 알릴지 말지에 대한 논의에서, 실제로는 알리지 말자고 주장하며, '무조건 알려야 한다'고 주장한 윤두수(尹斗壽, 1533∼1601)와 대립각을 세웠는데, 징비록에는 '이산해(李山海, 1539∼1609) 등이 보내지 말자고 했고 나는 무조건 알려야 된다고 했다'는 식으로 적어 놓았다.
즉 반성을 주제로 하였으면서도 스스로의 과오는 숨긴 부분이 존재하는 기록물이니, 일정한 교차 검증을 통해 기록되지 않은 류성룡의 과오⋅판단 착오를 밝혀낼 필요가 있다. 당시의 시대상이나 문화 풍토를 감안한다고 할지라도 곤란한 측면이 있기 때문. 다만 이후 朝鮮에선 ≪징비록≫이 군사 기밀 유출을 이유로 금지되었고 日本 쪽에서도 활발히 간행된 책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류성룡 본인과 직접 관련된 서술이 아닌 부분의 신뢰도는 높다고 간주할 수 있다.
6. 기타
당대 국정의 최고 책임자였던 인물이 쓴 전쟁 관련 증언이라는 점에서, 윈스턴 처칠의 ≪제2차 세계대전 회고록≫과도 비슷한 성격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2015년 2월 14일부터 동년 8월 2일까지 류성룡을 주인공으로 임진왜란기를 다룬 KBS 대하
7.국보 제132호(드라마 ≪징비록≫이 방영되었다.)
대구향교 경전반 萬峰 丁 珉榮 붕우의 글을 다시 싣습니다.
1. 개요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이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懲毖]"는 의도에서 자신이 겪은 임진왜란(壬辰倭亂)의 원인과 7년간의 전황을 자세하게 기록한 책이다. 임진왜란 당시 그는 영의정(領議政)과 도체찰사(都體察使)*1)로 군무와 국정 운영을 총괄하는 최고 책임자였다. 류성룡은 이 책에서 임진왜란을 日本이 朝鮮과 中國을 모두 침략한 동아시아 전쟁으로 파악하였다. 특히 징비록은 근세 일본인들에게 임진왜란을 알려 주는 주요한 사료로 인식되어 많이 인용되었다.
조선 선조(宣祖, 조선 제14대 왕, 재위 1552∼1567-1608) 시기에 영의정과 도체찰사를 지냈던 서애(西厓) 류성룡이 임진왜란 발발 당시인 1592년부터 1598년까지의 전황들을 기록한 수기. ≪난중일기(亂中日記)≫와 함께 임진왜란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묘사한 대표적인 저술 중 하나이다. 영어로는 한국어 발음을 옮긴 Jingbirok이라는 표기와 함께 '징비'를 의역해서 'The Book of Corrections'라고도 쓴다.
2. 내용
'징비록'이라는 이름은 ≪시경(詩經)≫ 소비편(小毖篇)에 적혀 있는 "내가 지난 잘못을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予其懲而毖後患)"는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류성룡은 징비록의 자서에 "난중의 일은 부끄러울 따름이다."라고 적었는데, 스스로 반성한다는 의미에서 이 책을 저술한 것이다.
내용은 전쟁의 배경, 전투 당시의 상황, 朝鮮⋅日本과 明나라간의 외교 관계, 주요 맹장(猛將)에 대한 묘사와 전투 성과, 이후의 백성들의 생활상 등의 임진왜란에 대한 총체적인 기록이다. 저자인 류성룡은 임진왜란 당시 주요 직책을 역임한 덕분에 당시 보고된 문서들을 확보할 수 있었고, 그 자료들을 바탕으로 징비록의 집필을 진행할 수 있었다. 당시 남인(南人)의 일원이었던 류성룡이지만, 징비록에서는 비교적 객관적인 시각을 견지한다.
특히 일관되게 '왜적(倭敵)'이라는 표현만을 쓰기보다도 '일본(日本)'이라는 국호를 동시에 사용함으로써 무분별한 적개심 표현을 자제했을 뿐만 아니라, 전쟁 전의 배경에 대해서도 상세히 설명하여 '미리 살펴 전쟁을 막지 못한 것에 대해 돌이켜 반성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았다.*2) 또한 명군(明軍)의 원조를 중시하면서도 이순신(李舜臣, 1545∼1598)과 朝鮮 관민(官民), 의병의 공로를 특히 강조하며 朝鮮 중심 전쟁 사관을 확립하였다.
≪징비록≫이 저술되기 전까지는 中國과 日本 모두 임진왜란을 자국 중심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전장부터 朝鮮이었고, 朝鮮 역시 엄연히 전쟁의 한 축을 담당했는데도. 明나라의 임진왜란 관련 기록인 ≪양조평양록(兩朝平攘錄)≫에는 "(당시 朝鮮은) 정사가 해이해지고, 간신 류승총(柳承寵)(≒류성룡)과 이덕형(李德馨, 1561∼1613)이 국왕에게 아부하니"(…) 운운하는 기록이 버젓이 남아 있었다.*3) 그뿐만 아니라 日本의 침략 목적에 明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도 굳이 드러내지 않았으며, 어디까지나 朝鮮이 그 자체적인 문제 때문에 日本의 침략을 막지 못했으며, 明은 다만 도의적인 차원에서 朝鮮을 도왔을 뿐이라는 식으로 서술되었다. 朝鮮을 바라보는 이런 왜곡된 시각은 日本에까지 여과 없이 전해졌다. 日本 입장에서는 明이 朝鮮의 상국(上國)이므로 어련히 잘 알고 썼겠거니 해서 의심하지 않았던 것. 이러한 中國과 日本의 임진왜란 관련 시각이 균형감각을 갖추도록 한 종합적 기록이 바로 ≪징비록≫이었다. ≪징비록≫은 日本에 전해진 뒤 淸나라 학자 양수경(楊守敬, 淸, 1839∼1915)에게도 전해져, 현대 中國의 임진왜란 연구에까지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한편, 이순신을 강조한 대목과 관련해서는, 이순신을 천거한 사람이 바로 류성룡 자신이었으므로 그를 일정 부분 띄울 필요성도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애초에 둘은 절친이기도 했고. 물론 그렇다고 이순신의 공이 바래는 것은 아니겠지만.*4) 사실 이 때문인지 조정의 이순신 모함에 휩쓸려 자기도 가세했던(…) 사실을 적지 않았다. 물론 다른 시각으로 보는 주장도 있긴 하지만…후술된 비판 항목 참조.
≪징비록≫의 서술 목적 중 중요한 또 한 가지는, 류성룡 자신이 속한 南人의 반대 당파인 北人의 정치 공세에 의해 자신에게 덧씌워진 '주화오국(主和誤國)'*5)의 오명을 씻는 것이었다. ≪징비록≫에는 류성룡 자신이 明과 日本 사이의 강화에*6) 반대하였다는 내용의 적극적인 자기 변호가 실려 있으며, 이는 대체로 사실이기도 하다. 북인계에 가까운 데다가 의병 활동을 했던 곽재우(郭再祐, 1552∼1617) 역시 전후 日本과의 화의를 주장한 바 있다.
반성도 반성이지만 다른 기록과 함께 자기의 행적과 업적을, 사실을 표현해 두기 위했던 기록이기도 하다. 간첩 김순량(金順良)을 잡은 일이라든가 스스로의 우국충정, 明나라 측 인물들을 상대하느라 겪었던 고충 등을 기록해 두었다. 물론 대부분 '하늘 덕', '전하 덕' 등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이는 당대 사대부들의 의례적인 겸사로 해석된다. ≪징비록≫을 저술함으로써 남긴 전쟁사적 기록 여부를 제외하더라도, 전시재상으로서 류성룡이 남긴 업적은 상당하다.
3. 판본
≪징비록≫은 류성룡 개인이 저술한 초본과, 나중에 인쇄로 간행된 간행본이 남아있는데 간행본은 일부 내용을 수정 추가하고 진실 오류를 바로잡은 것이다.
특히 초본에 남아있는 국왕에 대한 비판적인 사실들은 상당수 수정되었는데 공문서인 실록 기록은 초본 기록에 가깝다. 예컨대 宣祖가 한양(漢陽)을 버리고 몽진할 당시 초본에는 선조가 몽진 의사를 갖고 이를 주도한 것처럼 서술하고 있으나 간행본에서는 그냥 조정 내에서 몽진에 대한 논의가 돌았다고 서술하고 있다. 광해군(光海君, 조선, 제15대 왕, 재위 1575∼1608-1623∼1641)을 세자에 임명하는 과정은 궁중의 비밀스러운 일이라고 여겨 몽땅 삭제. 또한 칠천량해전(漆川梁海戰)의 패전 소식이 전해진 후 이순신 재기용에 대해 초본에는 선조가 中國의 고사를 인용하며 비변사(備邊司)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다가 이항복(李恒福, 1556∼1618) 등이 이순신을 재기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아무 말 없이 나가 버렸다고 적었으나 간행본에서는 신하들이 권하니 선조가 그냥 따랐다고 적고 있다. 원균(元均, 1540∼1597)에 대한 비판도 초본이 훨씬 강도가 높다.
초본과 간행본의 차이를 알 수 있는 한 포스팅 내용. 초본 내에서도 '上欲誅之(임금께서 그를 죽이려고)'라고 썼다가 이를 취소선으로 지우고는 '命(명하여)'으로 고쳐 이어나간 부분이 확인된다고.
4. 해외
≪징비록≫은 이후 日本에 유출되어 큰 인기를 끌었는데*7) 언제 처음 전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1683년의 쓰시마 번주(對馬島 藩主) 서적 재물 조사 목록에 이미 '징비록'이 보이고, 1687년에 간행된 다른 책에서도 ≪징비록≫이 인용된 흔적이 있다. 1693년에는 中國과 韓國 문헌상의 日本 관련 기록을 모은 '이칭일본전(異稱日本傳)'*8)에 징비록의 내용이 일부 인용되었으며, 1695년(숙종 21년)에는 ≪징비록≫ 전체 내용에 朝鮮의 행정 구역표, 조선 지도가 첨부된 ≪조선징비록(朝鮮懲毖錄)≫이 간행되었다. 이 '조선징비록' 출간 사실이, 17년이나 지난 1712년에서야 朝鮮에 알려져 국가 안보 문제가 대두되는 한편, 서적 수출이 금지되고 조일(朝日) 외교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물론 이미 퍼질대로 퍼지기는 했지만. 한편 19세기 말에는 이 일본판 조선징비록이 日本에 체류했던 中國 학자를 통해 淸나라에도 전해졌다고. 동아시아 베스트셀러.
日本에서 간행된 '조선징비록'의 경우, 원서에서 비하적으로 쓰인 '관추(關酋)'가 본래의 관직명인 '관백(關白)'으로 수정된 정도 외에는 원서와 별반 차이가 없다고 한다. 참고로 '추(酋)'는 '두목, 추장' 등의 의미로, 미개한 종족의 우두머리를 의미하는 바, '누르하치(奴兒哈赤, 努爾哈赤)'에 대해서도 朝鮮에서 '노추(奴酋)'라고 쓴 바 있다. 원 저자인 류성룡의 입장에서는 침략의 원흉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해 결코 좋게 좋게 '관백'이라고 제대로 써 주고 싶었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일본판 조선징비록에 일본인 유학자 가이바라 엣켄(貝原益軒)*9)이 쓴 서문에는 "전쟁을 너무 좋아하는 것과 전쟁을 잊는 것 모두 경계해야 한다"면서, "도요토미 가문은 전쟁을 너무 좋아했기에 망했고, 朝鮮은 전쟁을 잊었기에 망할 뻔했다"고 되어 있다.*10) 이어 재상 류성룡이 징비록을 쓴 것이 지당하다는 찬사와 함께 "이 책은 기사가 간결하고 말이 질박하니 과장이 많고 화려함을 다투는 세상의 다른 책들과는 다르다. 朝鮮 정벌을 말하는 자는 이 책을 근거로 삼는 것이 좋다. …(가히) 실록(實錄)이라 할 만하다."고 쓰여 있다.
현대의 일본인들은 임진왜란에 그다지 관심이 없으나 당대 일본인들에겐 대단한 관심거리였고 징비록이 인기를 끌었던 이유도 이와 연관되는데, 이는 비록 실패했지만 임진왜란이 당시 日本에서 몇 안 되는 日本의 대규모 해외 원정 사례였기 때문이었던 듯하다. 마르코 폴로(이탈리아, 1254∼1324)가 동방에 갔다와서 쓴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이 엄청난 인기와 서양인들의 오리엔탈리즘의 형성에 영향을 미친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겠다. 거기에다가 당대의 외교비사들이 가득 실려있기까지 하니 더더욱 흥미진진했을 것이다. 당시 日本에선 ≪징비록≫을 토대로 각종 전쟁 소설들도 만들어졌는데, 자료 부족으로 소설 내 삽화의 조선인들이 중국인 복장을 하고 있다. 한 일본인 작가가 뒤늦게 朝鮮의 민화를 입수하여 그에 맞게 고증을 하기도.
5. 비판
일찍이 임진년의 일을 추기(追記)하여 이름하기를 ≪징비록≫이라 하였는데 세상에 유행되었다. 그러나 식자들은 자기만을 내세우고 남의 공은 덮어버렸다고 하여 이를 기롱(譏弄 : 놀림)하였다.
선조 수정 실록 41권, 선조 40년 5월 1일 계해 2번째 기사 유성룡 졸기 中 일부에선 ≪징비록≫에 정작 무엇을 반성해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 서술이나 저자 자신에 대한 자성의 내용은 부족한 것 아니냔 비판도 한다.
이를테면 류성룡 자신에 대한 반성이 일정 부분 결여되어 있는 점이 대표적인 예. 류성룡은 의외로 우유부단한 면이 좀 있어서, 이순신의 2차 백의종군을 부른 어전회의에서 왕의 원균에 대한 편애와 당시 조정의 분위기에 휩쓸려 이순신 모함에 가담한 일이 있었는데,*11) 가장 반성해야 할 이런 사실에 대해서는 정작 기록이 별반 보이지 않는다. 다만 이것이 이순신을 살리기 위한 교책이었다는 반론도 있는데, 당대에도 류성룡이 이순신과 친밀하다는 사실은 유명했으므로 이순신을 증오한 선조 앞에서 잘못 두둔했다가는 진짜 이순신이 죽을 수도 있었기 때문에 일부러 그랬다는 것. 이후 이순신이 통제사(統制使)로 복귀하자 이전처럼 든든한 후견인이 되어 주었다.
또한 류성룡은 임진왜란 전에 이순신, 권율(權慄, 1537∼1599)과 더불어 원균을 추천하였는데, 원균은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가 되기 전 더 낮은 직위를*12) 받았을 때도 평이 좋지 않아 취소된 상황이었다. 이후 전쟁 기간 동안 원균의 잘못된 전쟁 수행으로 얼마나 심각한 손해가 생겼는지를 생각해 본다면, 사람을 잘못 봐도 한참 잘못 본 것. 이런 인사상의 오점에 대해서도 별다른 기록이 없다. 3명 중 2명은 잘 추천했는데, 잘못 추천한 나머지 1명 때문에 혹평을 받는 건 부당하다는 식의 말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건 조선 정부 입장도 마찬가지다. 조선 정부는 무능했고 민초들이 정부가 싼 똥을 다 치웠다는 통념과 달리, 조정에서는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전쟁준비를 하려고 했고 그것을 비협조로 일관한건 지방 양반들과 백성들이었다. 경상도(慶尙道)에서는 유생들까지 동원하며 열성적으로 전쟁준비를 했던 관리를 지방 양반들이 폭정을 일삼는다며 상소를 올렸고, 전라도(全羅道)에서는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노역을 부과했다는 이유로 민란까지 일어났다. 하지만 조정에서 잘한 점이 있을지라도 못한 부분을 혹평하는 것까지 부당하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고, 이것은 류성룡도 마찬가지다.
한편, 익히 알려져 있듯 1591년 황윤길(黃允吉, 1536∼?)과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이 사신으로 다녀와 왜군(倭軍)의 침략 가능성에 대해 서로 다른 입장을 보일 때, 류성룡은 '침략할 리가 없다'는 김성일 측 의견을 지지했다. 여기까지는 김성일이 나중에 '황윤길의 말이 지나쳐 일부러 반대로 말했다'고 했더라는 식으로 적고 있다. 문제는 히데요시가 보낸 국서 내용*13)을 明나라에 알릴지 말지에 대한 논의에서, 실제로는 알리지 말자고 주장하며, '무조건 알려야 한다'고 주장한 윤두수(尹斗壽, 1533∼1601)와 대립각을 세웠는데, 징비록에는 '이산해(李山海, 1539∼1609) 등이 보내지 말자고 했고 나는 무조건 알려야 된다고 했다'는 식으로 적어 놓았다.
즉 반성을 주제로 하였으면서도 스스로의 과오는 숨긴 부분이 존재하는 기록물이니, 일정한 교차 검증을 통해 기록되지 않은 류성룡의 과오⋅판단 착오를 밝혀낼 필요가 있다. 당시의 시대상이나 문화 풍토를 감안한다고 할지라도 곤란한 측면이 있기 때문. 다만 이후 朝鮮에선 ≪징비록≫이 군사 기밀 유출을 이유로 금지되었고 日本 쪽에서도 활발히 간행된 책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류성룡 본인과 직접 관련된 서술이 아닌 부분의 신뢰도는 높다고 간주할 수 있다.
6. 기타
당대 국정의 최고 책임자였던 인물이 쓴 전쟁 관련 증언이라는 점에서, 윈스턴 처칠의 ≪제2차 세계대전 회고록≫과도 비슷한 성격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2015년 2월 14일부터 동년 8월 2일까지 류성룡을 주인공으로 임진왜란기를 다룬 KBS 대하
7.국보 제132호(드라마 ≪징비록≫이 방영되었다.)
대구향교 경전반 萬峰 丁 珉榮 붕우의 글을 다시 싣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