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우천황(蚩尤天皇)이 東夷의 역사에 미친 영향
상고시대 중원의 황제와 북방의 치우가 일장 대결을 벌인 싸움터로 유명한 탁록은 치우의 고향인 적성에서 서쪽으로 100여 km 떨어져있다. 탁록의 벌판에는 黃帝廟, 定車臺, 蚩尤墳, 蚩尤寨 등 고대 전장의 많은 흔적이 지명으로 남아있다. 치우채는 이름 그대로 치우가 설치한 군영이라는 뜻이다. 5천 년 전의 전설이 그대로 地名에 녹아 있는 것이다. 치우채는 탁록의 현성의 동남쪽 龍王塘村에 위치하며, 치우분은 치우채의 남쪽으로 약 20km 떨어진 곳이다.
蚩尤泉 은 탁록대전(涿鹿大戰) 때 치우부족의 人馬가 물을 마시던 곳이라고 전한다. 우물은 3m 정도의 둘레에 4~5m의 깊이인데 돌로 쌓여 있고 밑바닥에는 물이 한두 뼘 정도로 차있다. 몇 년 전만해도 사시장철 우물터 언저리에서 찰랑거렸으나 웬일인지 지금은 여름철을 제외 하고는 거의 말라있는 상태라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치우는 청동으로 창의 일종인 과(戈), 모(矛), 극(戟) 그리고 쇠뇌(弩)를 만들었으며, 이런 선진적인 무기를 이용하여 선후로 21개의 제후를 멸했다. 세력범위를 쟁탈하기 위해 그는 또 중원부족의 수령 皇帝와 전쟁을 선포했다. 4700년 전 치우의 부족은 炎帝의 부족과 이곳에서 대결전을 펼쳤다. 전쟁에서 황제는 天女 발(魃)과 응룡(應龍), 풍후(風後), 九天玄女, 의 도움을 받고, 치우는 과부족(夸夫族)인, 풍백우사(風伯雨師), 이매망량(魑魅魍魎)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대진을 보아도 범상하지 않는 이 싸움은 중국이 신화에서 제일 유명한 전쟁으로 평가되고 있다.
蚩尤는 연기를 빨아들이고 안개를 뿜으며 공중을 날고 험한 곳을 뛰어넘는 재간을 갖고 있었다. 치우의 법술로 천지간에 안개가 자욱하게 끼자 황제의 군사는 그만 방향을 잃는다. 황제는 나중에 ‘지남차’를 만들어 인도를 받는다. 싸움에 패한 치우는 황제에게 붙잡혀 죽임을 당한다. 이때 그의 피는 도리깨를 붉게 물들여 단풍 수림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로서 치우의 이야기는 마침표를 찍는다. 그러나 후세 사람들은 그를 잊지 않고 있다. 그것은 그가 발명한 병기들이 모두 청동시대의 주전병기로 되었던 것이다. 이때 그의 적수 황제는 이중 유독 하나의 병기만 장악하고 있었는데, 그 병기가 바로 검(劒)이라고 한다. 아무튼 청동기시대의 시조나 다름없는 치우는 비록 싸움에 패했으나 더구나 이름을 떨치게 되며 명실공한 軍神으로 추앙된다.
이 싸움에서 승리한 황제는 이때부터 명실상부한 중원지역의 부락연맹 수령이 되었다. 염제의 華族과 근친이고 또 한데 융합되었기 때문에 중국인들은 자기들을 염화(炎火)의 자손이라고 부른다. 대륙에서 華夏族 의 융합과 통일은 이때부터 서막을 열게 되는 것이다.
.결국 탁록대전에 패한 치우의 부족은 상당부분 원래의 고향을 떠났다고 한다. 훗날 대륙의 서남부로 이주한 苗人 즉 묘족(苗族) 역시 한민족처럼 치우를 선조로 섬기며 치우를 우공이라 부른다. 치우의 부족인 동이구려족(東夷九麗族)의 변천사를 볼 수 있는 한 단락이다. 이 동이의 한 갈래가 우여곡절 끝에 중원에 이주하여 商 나라를 세웠고 연산 기슭에 남아있던 한 갈래는 나중에 孤竹國을 세웠던 것이다.
중국에서는 치우의 부족이 점차 염제와 황제의 부족에게 영합되어 炎帝자손의 일부로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훗날 북방의 고구려가 멸망한 후 고구려인은 나중에 중원의 한족에게 동화되었다고 하는 설과 똑 같으며 흡사 붕어빵을 구워낸 것 같다. 아무튼 1990년대의 초반 황제상에 새워진 中華三祖堂은 바로 그런 설법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中華 3祖는 황제, 영제, 치우가 이른 바 중회민족의 선조라는 뜻이다. 이 말은 모두 끌어들여 삼조로 한 것이고 치우는 동이의 선조이니 중화의 할아버지는 아니다. 그러한 사실을 증명하는 三國時代 와당에 새겨진 치우릐 상을 보면 아래의 자료와 같다.
삼국시대에 동이의 조상이었기에 위와 같이 표현하여 숭상하고 있으며 중국의 소수민족 苗族은 치우가 자기들의 조상이라 하며 숭상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시해야하고 중국의 三祖堂은 우리 역사를 말살하려는 계책임에 틀림이 없는 것이다.
한편 중국 소수민족 중에 묘족이 있는데 이들이 치우황제의 후손이라 자처하며 살아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국제적인 경기가 있을 때마다 붉은 악마라는 이름으로 가면을 쓰거나 붉은 깃발을 흔들면서 우리 선수들을 응원하는 것을 자주 볼수 있다.
*'전쟁의 신 치우황제'라는 제목으로 KBS에서 촬영한 영상자료에서 사진을 인용하였으며,김호림 著 ‘고구려가 왜 북경에 있을까’에서도 인용하였다.
상고시대 중원의 황제와 북방의 치우가 일장 대결을 벌인 싸움터로 유명한 탁록은 치우의 고향인 적성에서 서쪽으로 100여 km 떨어져있다. 탁록의 벌판에는 黃帝廟, 定車臺, 蚩尤墳, 蚩尤寨 등 고대 전장의 많은 흔적이 지명으로 남아있다. 치우채는 이름 그대로 치우가 설치한 군영이라는 뜻이다. 5천 년 전의 전설이 그대로 地名에 녹아 있는 것이다. 치우채는 탁록의 현성의 동남쪽 龍王塘村에 위치하며, 치우분은 치우채의 남쪽으로 약 20km 떨어진 곳이다.
蚩尤泉 은 탁록대전(涿鹿大戰) 때 치우부족의 人馬가 물을 마시던 곳이라고 전한다. 우물은 3m 정도의 둘레에 4~5m의 깊이인데 돌로 쌓여 있고 밑바닥에는 물이 한두 뼘 정도로 차있다. 몇 년 전만해도 사시장철 우물터 언저리에서 찰랑거렸으나 웬일인지 지금은 여름철을 제외 하고는 거의 말라있는 상태라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치우는 청동으로 창의 일종인 과(戈), 모(矛), 극(戟) 그리고 쇠뇌(弩)를 만들었으며, 이런 선진적인 무기를 이용하여 선후로 21개의 제후를 멸했다. 세력범위를 쟁탈하기 위해 그는 또 중원부족의 수령 皇帝와 전쟁을 선포했다. 4700년 전 치우의 부족은 炎帝의 부족과 이곳에서 대결전을 펼쳤다. 전쟁에서 황제는 天女 발(魃)과 응룡(應龍), 풍후(風後), 九天玄女, 의 도움을 받고, 치우는 과부족(夸夫族)인, 풍백우사(風伯雨師), 이매망량(魑魅魍魎)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대진을 보아도 범상하지 않는 이 싸움은 중국이 신화에서 제일 유명한 전쟁으로 평가되고 있다.
蚩尤는 연기를 빨아들이고 안개를 뿜으며 공중을 날고 험한 곳을 뛰어넘는 재간을 갖고 있었다. 치우의 법술로 천지간에 안개가 자욱하게 끼자 황제의 군사는 그만 방향을 잃는다. 황제는 나중에 ‘지남차’를 만들어 인도를 받는다. 싸움에 패한 치우는 황제에게 붙잡혀 죽임을 당한다. 이때 그의 피는 도리깨를 붉게 물들여 단풍 수림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로서 치우의 이야기는 마침표를 찍는다. 그러나 후세 사람들은 그를 잊지 않고 있다. 그것은 그가 발명한 병기들이 모두 청동시대의 주전병기로 되었던 것이다. 이때 그의 적수 황제는 이중 유독 하나의 병기만 장악하고 있었는데, 그 병기가 바로 검(劒)이라고 한다. 아무튼 청동기시대의 시조나 다름없는 치우는 비록 싸움에 패했으나 더구나 이름을 떨치게 되며 명실공한 軍神으로 추앙된다.
이 싸움에서 승리한 황제는 이때부터 명실상부한 중원지역의 부락연맹 수령이 되었다. 염제의 華族과 근친이고 또 한데 융합되었기 때문에 중국인들은 자기들을 염화(炎火)의 자손이라고 부른다. 대륙에서 華夏族 의 융합과 통일은 이때부터 서막을 열게 되는 것이다.
.결국 탁록대전에 패한 치우의 부족은 상당부분 원래의 고향을 떠났다고 한다. 훗날 대륙의 서남부로 이주한 苗人 즉 묘족(苗族) 역시 한민족처럼 치우를 선조로 섬기며 치우를 우공이라 부른다. 치우의 부족인 동이구려족(東夷九麗族)의 변천사를 볼 수 있는 한 단락이다. 이 동이의 한 갈래가 우여곡절 끝에 중원에 이주하여 商 나라를 세웠고 연산 기슭에 남아있던 한 갈래는 나중에 孤竹國을 세웠던 것이다.
중국에서는 치우의 부족이 점차 염제와 황제의 부족에게 영합되어 炎帝자손의 일부로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훗날 북방의 고구려가 멸망한 후 고구려인은 나중에 중원의 한족에게 동화되었다고 하는 설과 똑 같으며 흡사 붕어빵을 구워낸 것 같다. 아무튼 1990년대의 초반 황제상에 새워진 中華三祖堂은 바로 그런 설법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中華 3祖는 황제, 영제, 치우가 이른 바 중회민족의 선조라는 뜻이다. 이 말은 모두 끌어들여 삼조로 한 것이고 치우는 동이의 선조이니 중화의 할아버지는 아니다. 그러한 사실을 증명하는 三國時代 와당에 새겨진 치우릐 상을 보면 아래의 자료와 같다.
삼국시대에 동이의 조상이었기에 위와 같이 표현하여 숭상하고 있으며 중국의 소수민족 苗族은 치우가 자기들의 조상이라 하며 숭상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시해야하고 중국의 三祖堂은 우리 역사를 말살하려는 계책임에 틀림이 없는 것이다.
한편 중국 소수민족 중에 묘족이 있는데 이들이 치우황제의 후손이라 자처하며 살아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국제적인 경기가 있을 때마다 붉은 악마라는 이름으로 가면을 쓰거나 붉은 깃발을 흔들면서 우리 선수들을 응원하는 것을 자주 볼수 있다.
*'전쟁의 신 치우황제'라는 제목으로 KBS에서 촬영한 영상자료에서 사진을 인용하였으며,김호림 著 ‘고구려가 왜 북경에 있을까’에서도 인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