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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장 孔子時代(8~9)
23/04/06 07:03:07 김종국 조회 3135
제36장 공자시대(孔子時代)(8)
공자(孔子)는 대사구(大司寇)라는 높은 벼슬에 올랐지만, 기실 그의 정치적 후원자이자 동반자는 삼환(三桓) 중의 하나인 계손사(季孫斯)였다.
그 무렵, 공자의 학숙(學塾)에는 많은 제자들이 몰려들어 학문을 배우고 있었는데, 공자는 그 중 유능한 제자들을 계손사에게 천거했다. 이를테면 공자의 학숙은 정치인을 배출해내는 사관학교나 다름없었다.
공자가 계손사에게 천거한 대표적인 인물로는 자로(子路)와 자유(子有)를 꼽을 수 있다. 자로는 이름이 중유(仲由)로, 노나라 변(卞) 땅 사람이다.
공자보다 나이가 아홉 살 아래다.
자로는 성질이 거칠고 용맹을 좋아하였으며, 심지(心志)가 굳기로 널리 알려진 사람이다. 수탉의 꼬리로 관을 만들어 쓰기도 했고, 수퇘지의 가죽으로 주머니를 만들어 허리에 차고 다녔다.
그는 공자의 제자가 되기 전에는 시정 불량배였다.
심지어는 공자를 우습게 여기고 그를 때리려고까지 했다. 그러나 공자가 예로써 대하며 인(仁)의 세계를 행동으로 보여주자 조금씩 바른길로 들어섰으며, 마침내는 유복(儒服)을 입고 제자가 되기를 청했다.
자로는 공자와 마찬가지로 정치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어느 날 자로가 공자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정치를 잘할 수 있습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백성들이 마땅히 행해야 할 도리를 솔선수범하고, 백성들의 일에 몸소 애쓰는 것이 정치를 잘하는 것이다."
자로는 그 대답이 성에 안 찼던지 다시 물었다.
"그것뿐입니까? 더 보탤 것은 없습니까?"
"있다. 시종여일(始終如一)이 바로 그것이다. 아는 것을 행하되, 처음과 끝을 같게 하라."
'지행합일(知行合一)'과 '꾸준한 실천'을 강조하는 공자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또 다른 제자 자유의 이름은 염구(冉求)다.
염구는 공자보다 29년 연하다. 자유도 공자로부터 늘 행(行)의 중요성에 대해 강론을 들었다.
그런데 자유는 성격이 신중하고 조심스러웠던 모양이다. 성품이 거친 자로와는 대조적이었다. 공자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어 자로와 자유에 대해 다른 식으로 강론을 펼친 적이 있었다.
어느 날 자유가 물었다.
"의(義)를 들었으면 바로 행해야 합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바로 행해야 한다."
자로도 공자에게 같은 물음을 던졌다.
"의를 들었으면 바로 행해야 합니까?"
그러자 공자가 대답했다.
"부형(父兄)이 계시는데, 어찌 곧바로 의를 행할 수 있겠느냐?"
그래서는 안 된다는 대답이었다.
두 사람에 대한 대답이 다르다는 것을 안 또 다른 제자 자화(子華)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감히 선생님께 여쭙겠습니다. 물음은 같은데, 어찌하여 대답은 다릅니까?"
공자가 웃으며 대답했다.
"자유는 머뭇거리는 성품이라 진취성을 불러일으키려는 것이었고, 자로는 남에게 이기려고만 들기 때문에 억제시켜주려는 것이었다."
어쨌거나 자로나 자유는 공자의 천거를 받아 계손씨(季孫氏)의 신하가 되어 정치 일선에 뛰어든 대표적인 제자들이었다.
노(魯)나라의 수난은 그치지 않았다.

계손사의 가재(家宰)인 양호(陽虎)가 난을 일으켰다가 실패로 돌아간지 4년 후인 기원전 498년(노정공 12년).
이번에는 공산불뉴(公山不狃)가 또 난을 일으켰다.
공산불뉴 역시 계손사의 가신장(家臣長)으로 계손씨의 식읍(食邑)인 비읍(費邑)을 관리하고 있었다. 그 과정은 이러하다.
그해 여름, 계손사는 공산불뉴가 지나치게 강성해지자 몹시 불안했다. 그래서 공자를 불러 의논했다.
"공산불뉴가 양호를 본떠 또 반란을 일으키지나 않을까 걱정입니다. 좋은 방법이 없겠습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오늘날 가신(家臣)이 강성해진 것은 예법과 제도가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옛날에는 신하가 가병(家兵)을 둘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성(城)을 소유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가신들이 반란을 일으킬 근거를 차단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경대부(卿大夫)는 어떠합니까? 각자 성읍(城邑)을 소유하고 군사를 기르고 있지 않습니까? 만일 경대부들에게 가병과 성읍이 없다면 어찌 가신들이 반란을 일으킬 꿈을 꾸겠습니까? 그대는 비읍을 공실(公室)에 반납하십시오. 그러면 상하가 편안하고 반란도 영구히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계손사는 공자의 말을 옳게 여겼다.

맹손무기(孟孫無忌)와 숙손주구(叔孫州仇)를 불러 삼환의 재산 반납을 의논했다.
"공자의 말씀이 맞소. 우리가 재산을 반납하여 집안과 나라가 이롭게 된다면 무엇을 주저하리오."
세 사람은 이렇게 뜻을 모은 후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던 비읍과 성읍(成邑)을 공실에 반납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소정묘(少正卯)가 알았다.
그는 앞에 얘기한 바와 같이 앞에서와 뒤에서의 말이 다른 사람이었다. 더욱이 노정공(魯定公)과 삼환의 신임을 받고 있는 공자를 몹시 시기하고 있었다.
소정묘는 삼환이 재산을 반납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자 자신의 심복인 숙손첩(叔孫輒)을 비읍으로 보내 공산불뉴를 부추겼다.
"조만간 공실에서 비읍의 성을 허물 것이외다. 그렇게 되면 그대는 설 자리를 잃을 것이니, 그 전에 적절한 조치를 취하기 바라오."
공산불뉴는 자신의 근거지가 소멸될 것에 대해 불안을 느꼈다.

화가 치밀기도 했다. 그러나 섣불리 군사를 일으켰다가는 양호의 꼴이 되고말 것이 뻔했다.
그는 고심 끝에 魯나라 상하의 존경을 받고 있는 공자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리라 결심했다. 사람을 시켜 많은 예물을 공자에게 보내며 말을 전했다.
"잠시 비읍을 다녀가심이 어떠하신지요? 선생의 인의지도(仁義之道)를 배우고 싶습니다."
공산불뉴가 공자를 끌어들이려 한 것은 양호와 같은 수법이다.
그러나 다른 점이 있다면 양호는 잔꾀로써 공자를 끌어들이려 했으나, 공산불뉴는 정식으로 그를 초빙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공자는 공산불뉴에게로 가지 않았다.
정중히 예물과 초청장을 비읍으로 돌려보냈다.
공자가 초청에 응하지 않음으로써 공산불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이제 단 하나뿐이었다.
'순순히 물러나지는 않겠다.'
그는 군사를 모으기 시작했다.
공산불뉴는 맹손씨(孟孫氏)의 가신장인 공렴처보(公斂處父)와 숙손씨의 가신장인 약묘(若貓)에게 통보하여 함께 곡부성(曲阜城)으로 쳐들어가자고 제안했다. 그런데 공렴처보와 약묘는 공산불뉴의 청을 거절했다. 하는 수 없이 공산불뉴는 단독으로 곡부성을 칠 계획을 꾸몄다.

그러할 때 숙손주구의 식읍인 후읍(郈邑)에서 뜻하지 않은 변이 생겼다.
숙손씨의 가재인 약묘가 그 부하 후범(侯犯)이란 자에게 살해당한 것이었다. 후범은 약묘와 달리 힘이 장사이고 포악했다. 그는 약묘를 죽이고 자신이 후읍의 장(長)이 되었다.
이에 숙손주구는 후범을 치기 위해 맹손씨에게 도움을 청했다.
양가는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후읍으로 쳐들어갔다. 후범은 결사적으로 저항했다. 후읍의 군사들이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바람에 숙손씨와 맹손씨는 좀처럼 그들을 토벌할 수 없었다.
비읍에서 군사를 기르며 곡부성을 칠 기회만 노리고 있던 공산불뉴의 눈에 이것은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로 비쳤다.
'숙손씨와 맹손씨가 모두 후읍으로 달려갔으니 곡부성에는 계손씨만이 외로이 남아 있겠구나. 내 어찌 이 기회를 놓칠 수 있으랴.'

공산불뉴는 군사를 거느리고 곡부성으로 쳐들어갔다.
심복인 숙손첩이 성문을 열고 영접해주었다.
공산불뉴는 곧장 공궁(公宮)을 향해 달려갔다.
다급한 것은 노정공이었다. 그는 즉시 공자를 불러 의논했다.
"비읍의 반란군이 도성(都城) 안으로 쳐들어왔으니, 대관절 이를 어찌하면 좋겠소?"
공자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궁중 군사는 허약합니다. 일단 궁을 나가 계손씨의 집으로 피신하십시오."
노정공은 공자와 함께 수레를 타고 계손사의 집으로 달려갔다.
계손사의 집은 말이 집일 뿐 궁이나 다름없었다.
더욱이 안에는 높은 대(臺)가 있어 몸을 피하기 안성맞춤이었다. 노정공이 계손사의 집에 들어간지 얼마 안 되어 사마(司馬) 신구수(申句須)와 악기(樂頎)가 달려왔다.
공자는 그들에게 계손사의 가병을 맡겨 좌우에 매복시키고 자신은 고대(高臺) 입구에 버티고 섰다.
 
 
제36장 공자시대(孔子時代)(9)
노정공(魯定公)이 계손사(季孫斯)의 집으로 몸을 피한 같은 시각.
공산불뉴(公山不狃)는 공궁(公宮)을 공격하고 있었다.
궁중 수비대는 속절없이 무너졌다. 공산불뉴는 숙손첩(叔孫輒)의 안내를 받아 내궁(內宮)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궁중 어디에고 노정공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노정공이 계손사의 집으로 피신했다는 것을 알고 다시 군사를 몰고 계손사의 집으로 향했다. 반란군이 대문을 부수고 대(臺) 위로 올라가려는데, 문득 한 사내가 그 앞에 버티고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공자(孔子)였다.
반란군은 대부분 비읍(費邑)의 백성들이었다.
그들은 공자가 백성들에게 많은 덕을 베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에 대한 존경심이 대단했다. 공자를 보자 주춤하며 자신들도 모르게 공손한 태도를 취했다.
그때 공자의 입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너희들은 농사를 짓는 백성들이다. 주공(主公)이 여기 계신데, 너희들은 어찌 순리를 거스르려 하는 것이냐? 속히 무기를 버려라. 그러면 지금까지의 잘못은 처벌하지 않겠다."
주변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반란군은 하나 둘씩 칼을 버리고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이러한 급변에 당황한 것은 공산불뉴였다.
"무엇들 하느냐? 어서 대(臺) 안으로 진입하라!"
악을 써댔으나 몇몇 군사만 그에 호응할 뿐 대부분의 군사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공산불뉴는 악에 받쳐 직접 대 위로 뛰어올라가 공자를 베려 했다.
그 순간 좌우에 매복해 있던 사마(司馬) 신구수(申句須)와 악기(樂頎)가 뛰어나오며 외쳤다.
"역적은 함부로 성인의 몸에 더러운 손을 대지 마라!"
공손불뉴는 기겁초풍했다.
그는 좌우에 계손씨(季孫氏)의 가병(家兵)이 매복되어 있음을 알고 재빨리 몸을 돌려 밖으로 달아났다. 이어 숙손첩이 그 뒤를 따랐다.

겨우 곡부성(曲阜城)을 빠져나온 그들은 황급히 말머리를 돌려 오(吳)나라를 바라보고 달아났다. 이로써 '공산불뉴의 난'은 진정되었다.
그와 때를 같이하여 맹손무기(孟孫無忌)와 숙손주구(叔孫州仇)도 후범(侯犯)의 난을 진압했다.
후범은 겨우 탈출하여 제(齊)나라로 망명했다.
양호(陽虎)에 이어 공산불뉴, 후범 등의 난이 연이어 일어남에 따라 계손사와 맹손무기, 숙손주구는 서둘러 자로(子路)를 보내어 각 식읍(食邑)의 성을 허물고 높이를 세 척쯤 낮추었다.
계손사를 비롯한 삼환(三桓)은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었으나 공자는 이 모든 게 소정묘(少正卯)의 농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공자는 모든 신료들이 모인 자리에서 대사구(大司寇)의 자격으로 소정묘를 탄핵했다.
"지금까지의 모든 것은 소정묘가 교묘한 말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어지럽혔기 때문입니다."

공자의 이 같은 말에 신료들은 고개를 갸웃 흔들었다.
"소정묘는 우리 노(魯)나라에서 명성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고 있는데, 어찌 공산불뉴의 난이 소정묘의 농간이라고 하십니까?"
공자가 다시 노정공에게 아뢰었다.
"소정묘는 거짓을 참말처럼 말하고, 행동과 말이 같지 않아 알게 모르게 인심을 어지럽혀왔습니다. 저런 자를 죽이지 않으면 나라를 다스릴 수 없습니다. 신의 벼슬은 대사구(입니다."
그러고는 좌우 무사를 돌아보며 추상같은 명을 내렸다.
"군사들은 저자를 속히 참(斬)하지 않고 뭘 하고 있느냐?"
무사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소정묘를 결박했다.
결국 소정묘는 궁정 앞뜰로 끌려나가 참수형(斬首刑)에 처해졌다. 모든 신하들은 이 광경을 보고 얼굴색이 변했다.
이후로 魯나라 정치에 공자의 뜻이 반영되기 시작했다.
대사구 겸 재상(宰相)이 된 공자는 먼저 궁중 기강을 세우고 관료들에게 예의를 가르쳤으며 염치를 알게 했다. 그러자 백성들의 살림살이는 하루가 다르게 안정되어 갔다.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의 <공자세가(孔子世家)>를 통해 이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공자(孔子)가 정치를 맡은 지 3개월이 지나자 양과 돼지를 파는 사람들이 가격을 속이지 않았다. 남녀가 길을 갈 때는 따로 걸었으며, 길가에 떨어진 물건을 주워가는 사람도 없어졌다. 사방에서 모여드는 여행자들은 관리에게 허가를 받을 필요가 없었고, 모두 잘 접대를 받아 만족해하며 돌아갔다.

바야흐로 공자의 이상(理想) 정치가 魯나라 땅에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이때가 기원전 496년(노정공 14년).
공자의 나이 56세 때의 일이었다.
그러나 공자의 이상정치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공자의 예법과 인의지도(仁義之道)로 인해 魯나라가 태평성대를 누리기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아 魯나라 공실(公室)과 경대부(卿大夫)들은 다시 사치와 향락에 빠져버린 것이었다.
魯나라 정치가 다시금 타락의 길로 빠져들게 된 원인으로 재미난 일화가 전해온다. 그 무렵 齊나라는 명재상(名宰相) 안영(晏嬰)이 세상을 떠나고 제경공(齊景公)의 총신(寵臣)인 대부(大夫) 여미(黎彌)가 정책을 입안하고 있었다.
제경공은 魯나라가 하루가 다르게 안정되어가는 것을 보고 몹시 불안해했다.
"공자가 정치를 잘하면 魯나라는 패권(覇權)을 잡을 것이요, 魯나라가 패권을 잡으면 가장 먼저 우리 齊나라를 억압하려들 것이다. 장차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는가?"

대부 여미는 잔꾀를 내는 데 일가견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제경공의 우울한 표정을 보고 아뢰었다.
"주공께서는 공자 때문에 걱정하시면서 어찌 그를 방해할 생각을 하지 않으십니까?"
"내가 무슨 수로 공자의 정치를 방해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주공께서는 신의 계책을 들어보시렵니까?"
"말해보라."
"신이 듣건대 매사가 안정되면 사람은 교만해지고 사치스러워진다고 하였습니다. 주공께서는 노후(魯侯)에게 우호를 두터이 한다는 핑계로 음악 잘하는 미인들을 많이 보내십시오."
"魯侯가 그 미인들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틀림없이 정사(政事)에 게을러질 것이요, 자연 공자를 멀리할 것입니다. 그러면 공자는 魯나라를 버리고 다른 나라로 갈 것이니, 공자 없는 魯나라가 어찌 패권을 잡을 수 있겠습니까?"
"묘책이로다!"
제경공은 몹시 기뻐하며 그날부터 전국 각지에서 아름다운 처녀 80명을 뽑아들여 10대(隊)로 편성했다. 그리고 그 미인들에게 수놓은 비단옷을 입힌 후 밤낮없이 노래와 춤과 음악을 가르쳤다.
이때 가르친 음악이 '강악(康樂)'이며, 그 춤을 '강악무(康樂舞)'라고 한다.
강악은 전에 없이 아름다운 곡조였으며, 강악무는 황홀하기 그지없어 보는 사람의 넋을 빼놓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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