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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장 공자시대(孔子時代)(2)
23/03/27 08:24:07 김종국 조회 3443
제36장 공자시대(孔子時代)(2)

그날 밤 징재(徵在)에게 산기(産氣)가 왔다.
문득 하늘에서 창룡(蒼龍) 두 마리가 내려와 산 좌우를 지켰다. 또 공중에서 신녀(神女) 두 사람이 내려와 향로를 받들었다. 두 신녀는 징재를 목욕시킨 후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
잠시 후 징재는 아들을 낳았다.
이때 석문(石門)에서 맑은 샘물이 솟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그 샘물은 따뜻했다. 갓난아기를 목욕시키고나자 샘물은 다시 말라버렸다.
숙량흘(叔梁紇)은 기뻐하며 말했다.
"이 아이는 중니산(仲尼山)에서 기도를 드려 난 아이니, 이름을 구(丘)라 하고 자를 중니(仲尼)라 합시다."

산동성(山東省) 곡부현(曲阜縣)에서 30리쯤 남쪽으로 가면 여릉산(女陵山)이라는 산이 있다. 지금도 그 산에 오르면 공자가 탄생했다는 공상(空桑)이란 곳이 있다.
이 탄생일화는 상당히 설화적이고 꾸민 냄새가 난다.
유교(儒敎)가 국교화된 이후 그 시조에 대해 미화작업을 벌인 것임에 틀림없다.
이에 반해 사마천(司馬遷)의 공자 출생에 관한 기록은 상당히 실제적이고 인간적이다.
흘(紇), 안씨와 야합(野合)하여 공자를 낳았다.
이구산(尼丘山)에서 기도를 하여 공자를 얻었다. 노양공(魯襄公) 22년에 태어났다. 머리 중간이 움푹 패어 있었기 때문에 구(丘)라고 이름 지었다.
자(字)는 중니(仲尼), 성은 공(孔)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야합(野合)'이라는 말이다.
야합이란 말뜻에 대해서는 해석이 분분하다. 정식으로 결혼한 부부가 아니라는 설이 있고, 정식으로 결혼했으나 예(禮)를 갖추지 못했을 때라는 설(說)도 있다. 또 나이 차이가 너무 큰 결혼을 일러 야합이라고 주장하는 설도 있다.
그러나 역시 첫 번째 설(說)이 가장 많이 통용된다.
그 근거로 다음과 같은 일화를 들고 있다.
공자가 태어나고 얼마 안 있어 숙량흘은 세상을 떠났는데, 공자는 오랫동안 아버지의 무덤이 어디 있는지를 알지 못했다. 어머니조차 무덤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아버지의 무덤을 가르쳐주지 않은 까닭이 무엇이었을까. 이 답이 바로 야합이라는 것이다. 떳떳한 부부 사이였다면 어찌 남편의 무덤을 쉬쉬하고 숨길 것인가.
어쨌거나 공자는 늙은 아버지, 젊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이내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에게서 양육되었다.
공자의 어린 시절은 가난하고 천했다.
희한한 것은 소꿉장난을 할 때 늘 제기(祭器)를 펼쳐놓고 예(禮)를 올리는 놀이를 했다는 점이다. 여기서 제례(祭禮)란 곧 학문을 말할 수도 있다.
당시의 학문에는 반드시 예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이 일화를 근거로 공자의 어머니는 무당이 아니었을까 하는 설(說)을 내세우는 사람도 있다.
그는 성년이 되어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에야 아버지의 무덤을 찾았고, 비로소 방산(防山)이라는 곳에 어머니와 합장했다.

공자는 키가 9척 6촌이나 되었다.
2m가 넘는 상당한 거구다. 그래서 그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키다리'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의 학문과 높은 덕성은 젊어서부터 인근에 알려지기 시작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 알려짐은 우리가 짐작하는 것처럼 그렇게 선풍적이지는 않았다. 미리 말하면 공자의 명성이 중원(中原) 천지에 널리 알려진 것은 나이 50이 넘어서 행한 주유천하(周遊天下) 이후부터다. 그 전까지는 노(魯)나라 일부지역에서만 그의 학문과 사상과 성덕을 인정해주었을 뿐이다.
당시 청년들이 그러했듯 공자도 젊어서는 관직에 진출했다.
그가 처음 맡은 일은 위리(委吏), 즉 창고지기였다. 그것도 나라의 창고지기가 아니라 당시 집권자 중 하나인 계씨(季氏)의 관리인으로서였다.

그는 보잘것없는 말단관리였지만 자신의 일에 충실했다.
위리에 이어 승진된 직책은 승전(乘田)이라는 관직이었다. 승전이란 목장관리인인데, 그가 목장을 관리하면서부터 우마(牛馬)가 잘 번식했다고 사서(史書)들은 기록하고 있다.
그런 중에도 공자는 자신의 학문 정진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의 이름은 차츰 고관대작들 사이에까지 알려지기 시작했다.
공자가 성장하여 활동했던 시기는 매우 혼란하고 어지러운 때였다.
특히 공자가 속했던 魯나라는 하극상까지 만연하여 춘추시대(春秋時代) 후기의 전형이라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공자가 관직에 진출했을 당시의 魯나라 군주(君主)는 노소공(魯昭公)이었다. 그런데 노소공에게는 아무런 권한이 없었다. 허수아비 군주였다. 나라의 실권을 쥔 사람은 계손씨(季孫氏), 맹손씨(孟孫氏), 숙손씨(叔孫氏)였다. 사람들은 이들을 삼환(三桓)이라 불렀다.

세 씨족 모두 노환공(魯桓公)의 후예이기 때문이다. 노환공하면 생각나는 것이 있다.
제양공(齊襄公)의 누이동생 문강(文姜)을 부인으로 삼은 군주다. 제양공과 문강은 오누이면서불륜 관계를 맺었다. 이 비밀을 알았기 때문에 노환공은 제(齊)나라 땅에서 처절한 죽음을 당했다.
노환공은 비운의 군주였지만 그 자손은 수대에 걸쳐 번영하여 魯나라 국정을 장악하였다. 魯나라의 모든 정치는 이 세 가문에 의해 이루어졌고, 이로 인해 군주는 꼭두각시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이런 중에 노소공은 자신의 권한을 찾기 위해 삼환 토벌의 싸움을 일으켰다. 기원전 517년(노소공 25년)의 일이었다. 이때 공자의 나이 35세. 그러나 노소공은 그 싸움에서 패했다. 그는 삼환에게 쫓겨 齊나라로 망명을 했다. 삼환은 새 임금을 세우지 않았다.
그냥 공석으로 놔두었다. 그래서 魯나라는 이후 7년간 군주 없는 이상한 정치 행태를 보여주었다. 이때 공자도 노소공이 망명해 있는 齊나라로 들어갔다.
노소공을 섬기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생각은 없었다. 그가 齊나라로 간 것은 삼환이 전횡하고 있는 魯나라에서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齊나라에서 관직을 얻으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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