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장 공자(孔子)시대(1)
장강(長江)과 회수(淮水), 한수(漢水) 일대를 중심으로 초(楚)나라와 오(吳)나라가 끊임없이 다툼을 벌이는 동안, 황하(黃河)를 중심으로 한 북방의 중원(中原)지대에는 한 사내가 등장하여 조용하면서도 신선한 충격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사내의 성은 공(孔), 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공구(孔丘)나 공중니(孔仲尼)라고 부르지 않았다.
한결같이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이름하여 '공자(孔子)'였다.
-공자.
너무나 유명한 이름이다.
中國은 물론 우리나라나 一本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친 대성(大聖)이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요즘도 우리는 알게 모르게 공자와 더불어 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공자는 영생불멸의 성인이다.
공자의 사상은 한마디로 '인(仁)'과 '예(禮)'다.
특히 예에 대해서 강조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 서야하는데, 그 기본 중의 기본이 바로 '예(禮)'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주창한 것이 '극기복례(克己復禮)'다.
극기란 자기 자신의 완성이요, 복례란 타인과의 원활한 관계를 말함이다. 자신을 먼저 세워야 예(禮)가 있는 사회가 이루어질 것이요, 예가 서야 인(仁)이 행해지는 세상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공자는 설파했다.
다 아는 바와 같이 공자는 자신의 시대에 자신의 사상을 꽃피우지는 못했다. 공자의 사상, 즉 유학(儒學)이 전성을 이룬 것은 한(漢)나라 때였다. 그는 사후에야 세상을 뒤흔드는 사상가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공자의 사상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공자가 태어나 성장하고 활동하던 시기는 두말할 나위없이 춘추시대(春秋時代) 후기다. 난신적자(亂臣賊子)가 성행하고, 권모술수(權謀術數)가 판을 치던 어지러움의 시대, 이 시대에 과연 공자가 정치적으로는 어떠한 행로를 밟았는지를 잠깐 보여주고자 할 뿐이다.
공자는 기원전 551년(노양공 22년) 노(魯)나라 추읍(鄒邑)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노양공(魯襄公) 22년이라면 진(晉)나라 권력 대부(大夫) 중의 한 사람인 난영(欒盈)이 晉나라에서 축출되어 제(齊)나라로 망명한 바로 그 해다.
≪사기(史記)≫나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은 모두 이 해를 공자 출생의 해로 잡고 있으나,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과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은 1년 앞당긴 기원전 552년을 공자 출생의 해로 기록하고 있다.
공자의 선조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송(宋)나라 귀족이었다는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춘추시대 초기 宋나라에 공보가(孔父嘉)라는 사람이 있었다.
송상공(宋殤公) 시절, 그는 태재(太宰)인 화독(華督)의 공격을 받고 멸족을 당했다. 그때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혈육 하나가 있었다. 충복의 품에 안겨 겨우 목숨을 구한 그 혈육의 이름은 목금보(木金父).
충복은 목금보를 끌어안고 魯나라로 탈출했다.
그뒤 목금보는 魯나라에 살면서 다시 성을 공(孔)으로 바꾸었는데, 그가 바로 공자의 6대조라는 것이다.
≪사기≫의 <공자세가(孔子世家)>에는 공자의 선조로 3대조인 공방숙(孔防叔)을 기록하고 있다. 그의 선조는 宋나라 사람 공방숙이다.
방숙(防叔)은 백하(伯夏)를 낳았고, 백하는 숙량흘(叔梁紇)을 낳았다.
이 숙량흘이 바로 공자의 아버지다.
숙량흘의 신분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사(士)였다. 사라고 하면 얼핏 선비를 떠올릴 수 있겠으나, 이 무렵은 아직 문무가 확실하게 구별되지 않았기 때문에 단순히 선비로 해석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사는 훗날 선비와 무사 두 신분으로 나뉘어진다. 대부보다 한 단계 아래로서,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신분이라고 하면 적당할 것이다. 齊나라의 명재상(名宰相) 안영(晏嬰)의 아버지 안약(晏弱)도 사였다. 부역을 나가는 평민보다는 위다.
숙량흘은 사의 신분으로서 무예가 뛰어난 용사였다.
힘도 셌다. 그는 젊었을 적 싸움터에 나가 무너져 내리는 성문을 혼자 두 손으로 떠받칠 정도의 용맹을 과시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숙량흘은 원래 魯나라 시씨(施氏) 집 여자에게 장가를 들었다.
시씨와의 사이에 딸만 여럿을 낳고 아들은 낳지 못했다. 그래서 첩을 두었는데, 첩의 몸에서 아들 맹피(孟皮)가 태어났다. 그러나 맹피는 백치인데다가 다리를 못쓰는 불구가 되었다.
숙량흘은 다시 여자를 얻기로 하고 안씨(顔氏) 집에 매파를 보냈다. 이때 숙량흘의 나이 60이 넘지 않았을까.
안씨에게는 시집가지 않은 딸이 다섯이나 있었다. 안씨는 이미 노인이 된 숙량흘에게 딸을 주기가 싫었다. 그렇다고 숙량흘의 청혼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딸 다섯을 불러놓고 물었다.
"너희들 중 누가 숙량흘에게 시집갈 테냐?"
위로 네 딸은 묵묵부답이었다. 가장 어린 막내딸 징재(徵在)만이 대답했다.
"여자는 출가하기 전 아버지의 말씀을 좇을 뿐입니다. 저희들에게 물을 것 없이 아버지께서 정하십시오."
안씨는 그 말을 듣고 막내딸 징재를 숙량흘에게 시집보냈다.
숙량흘은 징재와 혼인했으나 자식이 생기지 않아 늘 근심이었다. 이에 그들 부부는 중니산(仲尼山)에 올라가 기도를 드리기로 했다.
하루는 그들이 중니산으로 올라가는데 모든 풀과 잎들이 그녀를 향해 꼿꼿이 일어섰다. 또 기도를 마치고 산을 내려올 때는 풀과 잎들이 다 아래로 처졌다.
'이상한 일이로군.'
그날 밤 징재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그녀는 흑제(黑帝)에게 불려갔다.
흑제란 겨울의 신(神)이다. 북방의 신이기도 하다. 그 흑제가 징재에게 말했다.
"그대는 성스러운 아들을 둘 것이다. 장차 공상(空桑)에서 태어나리라."
깨어보니 꿈이었다.
그날 밤부터 징재에게는 태기가 있었다.
어느 날이었다.
징재(徵在)가 비몽사몽간에 뜰을 바라보니 다섯 노인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징재를 향해 말했다.
"우리는 오성(五星)의 정령이다."
다섯 노인은 송아지만한 짐승 하나를 데리고 있었다.
그런데 뿔이 하나였고, 온몸이 용 비늘 같은 무늬로 얼룩얼룩하였다. 짐승은 징재를 향해 엎드리더니 옥척(玉尺) 하나를 토해냈다. 옥척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져져 있었다.
'수정(水精)의 아들은 쇠약한 주(周)나라를 계승하여 소왕(素王)이 되리라.'
소왕이란 무늬없는 옷을 입은 왕, 즉 지위없는 왕을 말함이다.
징재는 신기하고 놀랍기도 하여 비단 끈으로 그 짐승의 뿔을 곱게 매주었다.
그날 저녁, 징재는 외출에서 돌아온 남편 숙량흘에게 낮에 있었던 일을 말해주었다. 숙량흘이 말했다.
"그 짐승은 기린(麒麟)이었을 것이오."
해산달이 되었다.
징재가 숙량흘에게 물었다.
"공상이란 곳을 아십니까?"
"남산(南山)에 빈 도랑이 있는데, 그곳에 돌로 된 굴이 하나 있소. 그 굴 속에는 물이 없소. 그래서 사람들은 그곳을 공상이라고 부른다오."
"저는 그곳에 가서 해산하겠습니다."
"어째서 그곳에서 해산해야 한단 말이오?"
"전날 꿈속에서 흑제를 뵈었는데, 흑제께서 공상에서 해산하라 명했기 때문입니다."
숙량흘은 징재를 데리고 남산의 공상으로 들어가 이부자리를 폈다.
四書班 朋友 丁萬峰 제공
장강(長江)과 회수(淮水), 한수(漢水) 일대를 중심으로 초(楚)나라와 오(吳)나라가 끊임없이 다툼을 벌이는 동안, 황하(黃河)를 중심으로 한 북방의 중원(中原)지대에는 한 사내가 등장하여 조용하면서도 신선한 충격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사내의 성은 공(孔), 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공구(孔丘)나 공중니(孔仲尼)라고 부르지 않았다.
한결같이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이름하여 '공자(孔子)'였다.
-공자.
너무나 유명한 이름이다.
中國은 물론 우리나라나 一本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친 대성(大聖)이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요즘도 우리는 알게 모르게 공자와 더불어 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공자는 영생불멸의 성인이다.
공자의 사상은 한마디로 '인(仁)'과 '예(禮)'다.
특히 예에 대해서 강조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 서야하는데, 그 기본 중의 기본이 바로 '예(禮)'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주창한 것이 '극기복례(克己復禮)'다.
극기란 자기 자신의 완성이요, 복례란 타인과의 원활한 관계를 말함이다. 자신을 먼저 세워야 예(禮)가 있는 사회가 이루어질 것이요, 예가 서야 인(仁)이 행해지는 세상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공자는 설파했다.
다 아는 바와 같이 공자는 자신의 시대에 자신의 사상을 꽃피우지는 못했다. 공자의 사상, 즉 유학(儒學)이 전성을 이룬 것은 한(漢)나라 때였다. 그는 사후에야 세상을 뒤흔드는 사상가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공자의 사상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공자가 태어나 성장하고 활동하던 시기는 두말할 나위없이 춘추시대(春秋時代) 후기다. 난신적자(亂臣賊子)가 성행하고, 권모술수(權謀術數)가 판을 치던 어지러움의 시대, 이 시대에 과연 공자가 정치적으로는 어떠한 행로를 밟았는지를 잠깐 보여주고자 할 뿐이다.
공자는 기원전 551년(노양공 22년) 노(魯)나라 추읍(鄒邑)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노양공(魯襄公) 22년이라면 진(晉)나라 권력 대부(大夫) 중의 한 사람인 난영(欒盈)이 晉나라에서 축출되어 제(齊)나라로 망명한 바로 그 해다.
≪사기(史記)≫나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은 모두 이 해를 공자 출생의 해로 잡고 있으나,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과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은 1년 앞당긴 기원전 552년을 공자 출생의 해로 기록하고 있다.
공자의 선조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송(宋)나라 귀족이었다는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춘추시대 초기 宋나라에 공보가(孔父嘉)라는 사람이 있었다.
송상공(宋殤公) 시절, 그는 태재(太宰)인 화독(華督)의 공격을 받고 멸족을 당했다. 그때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혈육 하나가 있었다. 충복의 품에 안겨 겨우 목숨을 구한 그 혈육의 이름은 목금보(木金父).
충복은 목금보를 끌어안고 魯나라로 탈출했다.
그뒤 목금보는 魯나라에 살면서 다시 성을 공(孔)으로 바꾸었는데, 그가 바로 공자의 6대조라는 것이다.
≪사기≫의 <공자세가(孔子世家)>에는 공자의 선조로 3대조인 공방숙(孔防叔)을 기록하고 있다. 그의 선조는 宋나라 사람 공방숙이다.
방숙(防叔)은 백하(伯夏)를 낳았고, 백하는 숙량흘(叔梁紇)을 낳았다.
이 숙량흘이 바로 공자의 아버지다.
숙량흘의 신분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사(士)였다. 사라고 하면 얼핏 선비를 떠올릴 수 있겠으나, 이 무렵은 아직 문무가 확실하게 구별되지 않았기 때문에 단순히 선비로 해석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사는 훗날 선비와 무사 두 신분으로 나뉘어진다. 대부보다 한 단계 아래로서,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신분이라고 하면 적당할 것이다. 齊나라의 명재상(名宰相) 안영(晏嬰)의 아버지 안약(晏弱)도 사였다. 부역을 나가는 평민보다는 위다.
숙량흘은 사의 신분으로서 무예가 뛰어난 용사였다.
힘도 셌다. 그는 젊었을 적 싸움터에 나가 무너져 내리는 성문을 혼자 두 손으로 떠받칠 정도의 용맹을 과시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숙량흘은 원래 魯나라 시씨(施氏) 집 여자에게 장가를 들었다.
시씨와의 사이에 딸만 여럿을 낳고 아들은 낳지 못했다. 그래서 첩을 두었는데, 첩의 몸에서 아들 맹피(孟皮)가 태어났다. 그러나 맹피는 백치인데다가 다리를 못쓰는 불구가 되었다.
숙량흘은 다시 여자를 얻기로 하고 안씨(顔氏) 집에 매파를 보냈다. 이때 숙량흘의 나이 60이 넘지 않았을까.
안씨에게는 시집가지 않은 딸이 다섯이나 있었다. 안씨는 이미 노인이 된 숙량흘에게 딸을 주기가 싫었다. 그렇다고 숙량흘의 청혼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딸 다섯을 불러놓고 물었다.
"너희들 중 누가 숙량흘에게 시집갈 테냐?"
위로 네 딸은 묵묵부답이었다. 가장 어린 막내딸 징재(徵在)만이 대답했다.
"여자는 출가하기 전 아버지의 말씀을 좇을 뿐입니다. 저희들에게 물을 것 없이 아버지께서 정하십시오."
안씨는 그 말을 듣고 막내딸 징재를 숙량흘에게 시집보냈다.
숙량흘은 징재와 혼인했으나 자식이 생기지 않아 늘 근심이었다. 이에 그들 부부는 중니산(仲尼山)에 올라가 기도를 드리기로 했다.
하루는 그들이 중니산으로 올라가는데 모든 풀과 잎들이 그녀를 향해 꼿꼿이 일어섰다. 또 기도를 마치고 산을 내려올 때는 풀과 잎들이 다 아래로 처졌다.
'이상한 일이로군.'
그날 밤 징재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그녀는 흑제(黑帝)에게 불려갔다.
흑제란 겨울의 신(神)이다. 북방의 신이기도 하다. 그 흑제가 징재에게 말했다.
"그대는 성스러운 아들을 둘 것이다. 장차 공상(空桑)에서 태어나리라."
깨어보니 꿈이었다.
그날 밤부터 징재에게는 태기가 있었다.
어느 날이었다.
징재(徵在)가 비몽사몽간에 뜰을 바라보니 다섯 노인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징재를 향해 말했다.
"우리는 오성(五星)의 정령이다."
다섯 노인은 송아지만한 짐승 하나를 데리고 있었다.
그런데 뿔이 하나였고, 온몸이 용 비늘 같은 무늬로 얼룩얼룩하였다. 짐승은 징재를 향해 엎드리더니 옥척(玉尺) 하나를 토해냈다. 옥척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져져 있었다.
'수정(水精)의 아들은 쇠약한 주(周)나라를 계승하여 소왕(素王)이 되리라.'
소왕이란 무늬없는 옷을 입은 왕, 즉 지위없는 왕을 말함이다.
징재는 신기하고 놀랍기도 하여 비단 끈으로 그 짐승의 뿔을 곱게 매주었다.
그날 저녁, 징재는 외출에서 돌아온 남편 숙량흘에게 낮에 있었던 일을 말해주었다. 숙량흘이 말했다.
"그 짐승은 기린(麒麟)이었을 것이오."
해산달이 되었다.
징재가 숙량흘에게 물었다.
"공상이란 곳을 아십니까?"
"남산(南山)에 빈 도랑이 있는데, 그곳에 돌로 된 굴이 하나 있소. 그 굴 속에는 물이 없소. 그래서 사람들은 그곳을 공상이라고 부른다오."
"저는 그곳에 가서 해산하겠습니다."
"어째서 그곳에서 해산해야 한단 말이오?"
"전날 꿈속에서 흑제를 뵈었는데, 흑제께서 공상에서 해산하라 명했기 때문입니다."
숙량흘은 징재를 데리고 남산의 공상으로 들어가 이부자리를 폈다.
四書班 朋友 丁萬峰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