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부
4.읍루(挹婁)
읍루는 부여의 동북으로 1천여 리 떨어진 거리에 있고, 큰 바다에 연해 있고, 남쪽은 북옥저北沃沮와 접하고 그 북쪽 끝은 어디까지 이르는지 알 수 없다.
읍루의 지형은 높고 험준한 산들이 많다. 사람들의 외모는 부여 사람들과 비슷하나 그 언어는 부여‧고구려와 같지 않다. 오곡과 소‧말‧마포가 산출된다. 사람들은 용감하고 힘이 세다. 읍루 전체를 다스리는 大君長은 없고 각 촌락마다 수령(大人)들이 있다. (挹婁在扶餘東北千餘里 濱大海 南與北沃沮接 未知其北所極 其土地多山險 其人形似扶餘 言語不與扶餘‧高句麗同 有五穀‧牛‧馬‧麻布 人多勇力 無大君長 邑落各有大人)
(*역자 주:단재 신채호는 부여에서 동북으로 천 여리 있는 것은 挹婁가 아니라 <러신>국이라 하였다.)
읍루사람들은 산림 가운데 있는 굴속에서 생활한다. 큰 집은 땅속에 깊이판 굴로서 그 굴의 깊이가 아홉 계단이나 된다. 계단이 많을수록 더 좋은 집이라 여긴다. 땅의 기운은 부여보다 훨씬 한랭하다. 읍루의 풍속은 돼지 기르기를 좋아한다. 돼지고기를 먹고, 돼지가죽으로 옷을 해 입는다. 겨울에는 돼지기름을 몸에 바르는데, 무려 몇 푼이나 될 정도로 두텁게 발라서 찬바람과 추위를 막는다. 여름에는 벌거벗은 채 지내는데, 다만 한 자 남짓되는 천으로 몸의 아랫도리만 가린다. 사람들의 위생은 불결하다. 돼지우리를 집안 가운데 만들어 두고 그 돼지우리를 둘러싸고 거처한다. (處山林之間 常穴居 大家深九梯 多以爲好 土氣寒 劇於扶餘 其俗好養猪 食其肉 衣其皮 冬以猪膏塗身 厚數分 以禦風寒 夏則裸袒 以尺布隱其前後 以蔽形體 其人不潔 作溷(혼)在中央 人圍其表居)
읍루에서 나는 활은 길이가 4자(尺)로 그 힘은 쇠뇌와 같고, 화살은 호목(楛木)으로 만드는데, 이것이 바로 옛 숙신국肅愼國의 활이다. 사람들은 활을 쏘는데 활을 쏘는 사람들은 눈을 쏘아 맞힌다. 화살에는 독이 발려져 있어서 맞는 사람은 모두 죽는다. 이곳에서는 붉은 옥(赤玉)과 좋은 담비(貂)가 산출되는데, 지금 말하는 읍루의 담비(挹婁貂)란 바로 이것을 말한다. (其弓長四尺 力如弩 矢用楛(호) 長尺八寸 靑石爲鏃(족) 古之肅愼之國也 善射 射人皆入目 矢施毒 人中皆死 出赤玉․好貂 今所謂挹婁貂是也)
한漢 이래 읍루는 계속 부여에 신하로서 예속되었는데, 부여가 조세와 무역을 과중하게 요구하였음으로 위魏 문재文帝 황초黃初 연간(기원 220~226년)에 부여에 반기를 들었다. 부여가 그들은 수차례 그들을 정벌하였으나, 비록 읍루의 인구는 적었으나, 험준한 산에 자리하고 있었고 또 이웃나라 사람들이 그들의 활과 화살을 두려워하여 하기 때문에, 부여는 결국 그들을 항복시킬 수가 없었다. 읍루사람들은 배를 타고 노략질을 잘하였기 때문에 고통苦痛을 당한다. 동이족東夷族들은 음식을 먹을 때 대부분 조(俎)와 두(豆)와 같은 식기류를 사용하는데, 다만 읍루 사람들만 사용하지 않는다. 그들의 법도와 풍속은 동이족들 중에서 가장 기강이 없다. (自漢其末 臣屬扶餘 扶餘責其租賦重 以黃初中叛之 扶餘數伐之 其人衆雖少 所在山險 隣國人畏其弓矢 卒不能服也 其國便乘船寇盜 隣國患之 東夷飮食類皆俎豆 唯挹婁不 法俗最無綱紀也)
(*1.역자 주:신채호는 <삼국지>동이열전 교정에서, <음식을 먹을 때 조두를 사용하지 않고 법도와 풍습이 동이족 중에서 가징 기강이 없는 것>은 읍루가 아니라 ⌜러신⌟국이라 했다.
(*2.역자 주:읍루와 예맥은 본래 같은 ⌜러신⌟국의 이름인데 이를 별개로 보고 각각 따로 列傳을 둔 것은 <삼국지>저자(진수陳壽)의 착오라고 신채호申采浩는 <삼국지>동이열전 교정에서 밝혔다.)
5.예(濊)
濊는 남으로 진한과 접하고, 북으로 고구려高句麗․옥저와 접하고, 동쪽에는 큰 바다가 있는데, 지금 조선朝鮮의 이동以東은 모두 예에 땅이다. 인구는 2만호이다.
(濊南與辰韓 北與高句麗․沃沮接 東窮大海 今朝鮮之東皆其地也 戶二萬)
(*역자 주:단재 신채호는 남으로 진한과 접하고 북으로 고구려와 옥저와 접하고 있었던 것은 동부여라 하였다.)
옛날 은殷이 망하자 기자箕子가 조선으로 건너가서 여덟 조항의 규범으로 백성을 가르쳐서, 그곳 백성들은 문을 잠그는 일이 없었고 도적질을 하지 않았다. 그 뒤 40여 대代 후에 조선후朝鮮侯 기준箕準이 왕을 참칭하였다. 진승陳勝 등이 반기를 들고 일어나자 천하가 진秦에 반기를 들었다. 이때 연燕․제齊․조趙 백성들 중에 수만 명이 난을 피하여 조선朝鮮으로 갔다. 연燕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상투를 틀고 동이족東夷族의 옷을 입고 이곳으로 와서 왕이 되었다.(昔箕子旣適朝鮮 作八條之敎以敎之 無門戶之閉而民不爲盜 其後四十餘世 朝鮮侯準僭號稱王 陳勝等起 天下叛秦 燕․齊․趙民避之朝鮮數萬口 燕人衛滿 魋(퇴)結以服 復來王之)
(*역자 주:陳勝(기원전?~208년): 가난한 농민출신으로 진秦2세 원년(기원전209년)에 북방 변경 수비군으로 징발되어 가던 중 점현(蔪縣:지금의 안휘성 宿縣 東南의 劉村集)에서 오광吳廣 등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그 세력이 급격히 커져서 진현陳縣(:지금의 하남성 회양현)에 장초張楚 정권을 세우고 왕으로 추대되었다. 후에 싸움에 패하여 성보(成父)로 물러났을 때 피살되었다.)
한漢 무제武帝가 조선을 쳐서 멸망시키고 그 땅을 나누어 네 개의 군으로 만들었다. 그 후부터 그곳 사람들과 漢나라 사람들은 점차 분리되었다.
예濊에는 전체를 다스리는 대군장大君長은 없고, 한漢나라가 건립된 이래 그곳의 관직으로 후읍군侯邑君과 삼로三老가 있어서 백성들을 통솔하고 관장하였다. 그곳 노인들은 스스로 말하기를, 옛날에는 자신들과 고구려는 같은 종족이라고 하였다.
그곳 사람들은 성격이 신중하고 성실하며, 욕심이 적고, 염치가 있어서 남에게 청하거나 비는 일이 없다. 언어와 법, 풍속은 대략 고구려와 같으나 다만 의복은 다르다. 남녀 모두 옷깃이 둥근 옷을 입으며, 남자는 장식으로 넓이가 여러 치(寸) 되는 은으로 만든 꽃을 단다. (漢武帝伐朝鮮 分其地爲四郡 自是之後 胡․漢稍別 無大君長 自漢已來 其官有侯邑郡․三老 統主下戶 耆老老舊自謂與句麗同族 其性愿慤원각 少嗜慾 有廉恥 不請句麗匃 言語法俗大抵與句麗同 衣服有異 男女衣皆著曲領 男子繫銀花廣數寸以爲飾)
단단대령單單大嶺에서 이서以西는 낙랑에 속하고 이동以東의 7개 현縣은 동부도위東部都尉가 관리하는데, 그 백성들은 모두 예濊사람들이다. 후에 동부도위란 관직을 없애고 그들의 수령을 侯로 봉하였다. 지금의 불내예후不耐濊侯는 그 종족이다. 한漢말기에는 다시 고구려에 귀속되었다.(自單單大山領以西屬樂浪 自領以東七縣 都尉主之 皆以濊爲民 後省都尉 封其渠帥爲侯 今不耐濊皆其種也 漢末更屬句麗)
그곳의 풍속은 산천을 중시한다. 산천에는 경계가 있어서 다른 부락 소유의 산천으로 함부로 들어가지 못한다. 同姓끼리는 혼인하지 않는다. 꺼리고 피하는 것이 많은데, 질병으로 사망하는 자가 있으면 그가 살던 집을 버리고 새로 집을 짓는다. 麻布가 생산되며, 누에를 쳐서 솜옷을 만든다. 새벽에 별자리를 관찰하여 한 해의 풍년과 흉년을 미리 안다. 珠玉은 보물로 여기지 않는다. 항상 10월이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이때는 밤낮으로 술 마시며 노래하고 춤추는데 이 행사를 ‘舞天’이라고 한다. 또 호랑이를 신으로 섬기면서 제사를 지낸다.(其俗重山川 山川各有部分 不得妄相涉入 同姓不婚 多忌諱 疾病死亡輒損其舊宅 更作新居 有麻布 蠶桑作緜 曉候星宿 豫知年歲豊作約 不以珠玉爲寶 常用十月節祭天 晝夜飮酒歌舞 名之爲舞天 又祭虎以爲神)
부락 간에 서로 침범하는 일이 생기면 그 벌로 살아있는 소와 말을 바치게 하는데, 이를 책화責禍라고 한다. 사람을 죽이는 자는 그 벌로 사형에 처한다. 도적盜賊이 적다. 길이가 세 길이나 되는 긴 창을 때로는 여럿이 이것을 함께 사용하기도 한다. 보병전步兵戰에 능숙하다. 낙랑군의 단궁檀弓은 바로 이곳에서 산출된다. 바다에는 무늬 있는 물고기 가죽이 산출되고, 뭍에서는 무늬 있는 표범 가죽이 많이 산출된다. 또 과하마果下馬라는 왜소한 말이 산출되는데, 한漢나라 환제桓帝 때에는 이것을 중국에 조공으로 바친 적도 있다.(其邑落相侵犯 輒相罰責生牛馬 名之爲責禍 殺人者償死 少寇盜 作矛長三丈 或數人共持之 能步戰 樂浪檀弓出其地 其海出班魚皮 土地饒文豹 又出果下馬 漢桓時獻之)
(*原註: (一)臣松之按:果下馬高三尺 乘之可于果樹下行 故謂之果下 見博物志‧魏都賦): 신 裴松之가 생각하기에 과하마는 그 높이가 약 90cm로, 이것을 타고 과일나무 아래를 지나갈 수 있기 때문에 과하라고 부른 것 같다. 박물지博物志와 위도부魏都賦에 이에 대한 내용이 보인다.
위魏 제왕帝王의 정시正始(기원204~249년) 6년(기원245년)에 단단대령 이동以東의 예濊가 고구려에 예속된 것을 이유로 낙랑태수 유무劉茂와 대방태수 궁준弓遵이 군사를 일으켜 예濊를 치니 예의 수령인 불내후不耐侯 등이 성읍城邑을 들어 투항하였다. 정시正始 8년(247년)에 그들이 찾아와서 조공을 바치므로, 황제는 다시 조서를 내려서 그들의 수령을 불내예왕不耐濊王에 봉하였다. 이때부터 예왕은 민간에 섞여 거처하면서, 계절마다 郡정부로 찾아와 인사하였다. 낙랑과 대방 두 군에서 군사상 필요에서 인원 징집이나 물자 증발을 하게 될 때에는 예국濊國 사람들에게도 부담시켰는데, 그들에 대한 대우는 관내의 일반 중국 백성들과 똑 같이하였다. (正始六年 樂浪太守劉茂 帶方太守弓遵以領東濊屬句麗 興師伐之 不耐侯等擧邑降 其八年 詣闕朝貢 詣貢拜不耐濊王 居處雜在民間 四時濊濊郡朝謁 二郡有軍征賦調 供給役使 遇之如民)
4.읍루(挹婁)
읍루는 부여의 동북으로 1천여 리 떨어진 거리에 있고, 큰 바다에 연해 있고, 남쪽은 북옥저北沃沮와 접하고 그 북쪽 끝은 어디까지 이르는지 알 수 없다.
읍루의 지형은 높고 험준한 산들이 많다. 사람들의 외모는 부여 사람들과 비슷하나 그 언어는 부여‧고구려와 같지 않다. 오곡과 소‧말‧마포가 산출된다. 사람들은 용감하고 힘이 세다. 읍루 전체를 다스리는 大君長은 없고 각 촌락마다 수령(大人)들이 있다. (挹婁在扶餘東北千餘里 濱大海 南與北沃沮接 未知其北所極 其土地多山險 其人形似扶餘 言語不與扶餘‧高句麗同 有五穀‧牛‧馬‧麻布 人多勇力 無大君長 邑落各有大人)
(*역자 주:단재 신채호는 부여에서 동북으로 천 여리 있는 것은 挹婁가 아니라 <러신>국이라 하였다.)
읍루사람들은 산림 가운데 있는 굴속에서 생활한다. 큰 집은 땅속에 깊이판 굴로서 그 굴의 깊이가 아홉 계단이나 된다. 계단이 많을수록 더 좋은 집이라 여긴다. 땅의 기운은 부여보다 훨씬 한랭하다. 읍루의 풍속은 돼지 기르기를 좋아한다. 돼지고기를 먹고, 돼지가죽으로 옷을 해 입는다. 겨울에는 돼지기름을 몸에 바르는데, 무려 몇 푼이나 될 정도로 두텁게 발라서 찬바람과 추위를 막는다. 여름에는 벌거벗은 채 지내는데, 다만 한 자 남짓되는 천으로 몸의 아랫도리만 가린다. 사람들의 위생은 불결하다. 돼지우리를 집안 가운데 만들어 두고 그 돼지우리를 둘러싸고 거처한다. (處山林之間 常穴居 大家深九梯 多以爲好 土氣寒 劇於扶餘 其俗好養猪 食其肉 衣其皮 冬以猪膏塗身 厚數分 以禦風寒 夏則裸袒 以尺布隱其前後 以蔽形體 其人不潔 作溷(혼)在中央 人圍其表居)
읍루에서 나는 활은 길이가 4자(尺)로 그 힘은 쇠뇌와 같고, 화살은 호목(楛木)으로 만드는데, 이것이 바로 옛 숙신국肅愼國의 활이다. 사람들은 활을 쏘는데 활을 쏘는 사람들은 눈을 쏘아 맞힌다. 화살에는 독이 발려져 있어서 맞는 사람은 모두 죽는다. 이곳에서는 붉은 옥(赤玉)과 좋은 담비(貂)가 산출되는데, 지금 말하는 읍루의 담비(挹婁貂)란 바로 이것을 말한다. (其弓長四尺 力如弩 矢用楛(호) 長尺八寸 靑石爲鏃(족) 古之肅愼之國也 善射 射人皆入目 矢施毒 人中皆死 出赤玉․好貂 今所謂挹婁貂是也)
한漢 이래 읍루는 계속 부여에 신하로서 예속되었는데, 부여가 조세와 무역을 과중하게 요구하였음으로 위魏 문재文帝 황초黃初 연간(기원 220~226년)에 부여에 반기를 들었다. 부여가 그들은 수차례 그들을 정벌하였으나, 비록 읍루의 인구는 적었으나, 험준한 산에 자리하고 있었고 또 이웃나라 사람들이 그들의 활과 화살을 두려워하여 하기 때문에, 부여는 결국 그들을 항복시킬 수가 없었다. 읍루사람들은 배를 타고 노략질을 잘하였기 때문에 고통苦痛을 당한다. 동이족東夷族들은 음식을 먹을 때 대부분 조(俎)와 두(豆)와 같은 식기류를 사용하는데, 다만 읍루 사람들만 사용하지 않는다. 그들의 법도와 풍속은 동이족들 중에서 가장 기강이 없다. (自漢其末 臣屬扶餘 扶餘責其租賦重 以黃初中叛之 扶餘數伐之 其人衆雖少 所在山險 隣國人畏其弓矢 卒不能服也 其國便乘船寇盜 隣國患之 東夷飮食類皆俎豆 唯挹婁不 法俗最無綱紀也)
(*1.역자 주:신채호는 <삼국지>동이열전 교정에서, <음식을 먹을 때 조두를 사용하지 않고 법도와 풍습이 동이족 중에서 가징 기강이 없는 것>은 읍루가 아니라 ⌜러신⌟국이라 했다.
(*2.역자 주:읍루와 예맥은 본래 같은 ⌜러신⌟국의 이름인데 이를 별개로 보고 각각 따로 列傳을 둔 것은 <삼국지>저자(진수陳壽)의 착오라고 신채호申采浩는 <삼국지>동이열전 교정에서 밝혔다.)
5.예(濊)
濊는 남으로 진한과 접하고, 북으로 고구려高句麗․옥저와 접하고, 동쪽에는 큰 바다가 있는데, 지금 조선朝鮮의 이동以東은 모두 예에 땅이다. 인구는 2만호이다.
(濊南與辰韓 北與高句麗․沃沮接 東窮大海 今朝鮮之東皆其地也 戶二萬)
(*역자 주:단재 신채호는 남으로 진한과 접하고 북으로 고구려와 옥저와 접하고 있었던 것은 동부여라 하였다.)
옛날 은殷이 망하자 기자箕子가 조선으로 건너가서 여덟 조항의 규범으로 백성을 가르쳐서, 그곳 백성들은 문을 잠그는 일이 없었고 도적질을 하지 않았다. 그 뒤 40여 대代 후에 조선후朝鮮侯 기준箕準이 왕을 참칭하였다. 진승陳勝 등이 반기를 들고 일어나자 천하가 진秦에 반기를 들었다. 이때 연燕․제齊․조趙 백성들 중에 수만 명이 난을 피하여 조선朝鮮으로 갔다. 연燕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상투를 틀고 동이족東夷族의 옷을 입고 이곳으로 와서 왕이 되었다.(昔箕子旣適朝鮮 作八條之敎以敎之 無門戶之閉而民不爲盜 其後四十餘世 朝鮮侯準僭號稱王 陳勝等起 天下叛秦 燕․齊․趙民避之朝鮮數萬口 燕人衛滿 魋(퇴)結以服 復來王之)
(*역자 주:陳勝(기원전?~208년): 가난한 농민출신으로 진秦2세 원년(기원전209년)에 북방 변경 수비군으로 징발되어 가던 중 점현(蔪縣:지금의 안휘성 宿縣 東南의 劉村集)에서 오광吳廣 등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그 세력이 급격히 커져서 진현陳縣(:지금의 하남성 회양현)에 장초張楚 정권을 세우고 왕으로 추대되었다. 후에 싸움에 패하여 성보(成父)로 물러났을 때 피살되었다.)
한漢 무제武帝가 조선을 쳐서 멸망시키고 그 땅을 나누어 네 개의 군으로 만들었다. 그 후부터 그곳 사람들과 漢나라 사람들은 점차 분리되었다.
예濊에는 전체를 다스리는 대군장大君長은 없고, 한漢나라가 건립된 이래 그곳의 관직으로 후읍군侯邑君과 삼로三老가 있어서 백성들을 통솔하고 관장하였다. 그곳 노인들은 스스로 말하기를, 옛날에는 자신들과 고구려는 같은 종족이라고 하였다.
그곳 사람들은 성격이 신중하고 성실하며, 욕심이 적고, 염치가 있어서 남에게 청하거나 비는 일이 없다. 언어와 법, 풍속은 대략 고구려와 같으나 다만 의복은 다르다. 남녀 모두 옷깃이 둥근 옷을 입으며, 남자는 장식으로 넓이가 여러 치(寸) 되는 은으로 만든 꽃을 단다. (漢武帝伐朝鮮 分其地爲四郡 自是之後 胡․漢稍別 無大君長 自漢已來 其官有侯邑郡․三老 統主下戶 耆老老舊自謂與句麗同族 其性愿慤원각 少嗜慾 有廉恥 不請句麗匃 言語法俗大抵與句麗同 衣服有異 男女衣皆著曲領 男子繫銀花廣數寸以爲飾)
단단대령單單大嶺에서 이서以西는 낙랑에 속하고 이동以東의 7개 현縣은 동부도위東部都尉가 관리하는데, 그 백성들은 모두 예濊사람들이다. 후에 동부도위란 관직을 없애고 그들의 수령을 侯로 봉하였다. 지금의 불내예후不耐濊侯는 그 종족이다. 한漢말기에는 다시 고구려에 귀속되었다.(自單單大山領以西屬樂浪 自領以東七縣 都尉主之 皆以濊爲民 後省都尉 封其渠帥爲侯 今不耐濊皆其種也 漢末更屬句麗)
그곳의 풍속은 산천을 중시한다. 산천에는 경계가 있어서 다른 부락 소유의 산천으로 함부로 들어가지 못한다. 同姓끼리는 혼인하지 않는다. 꺼리고 피하는 것이 많은데, 질병으로 사망하는 자가 있으면 그가 살던 집을 버리고 새로 집을 짓는다. 麻布가 생산되며, 누에를 쳐서 솜옷을 만든다. 새벽에 별자리를 관찰하여 한 해의 풍년과 흉년을 미리 안다. 珠玉은 보물로 여기지 않는다. 항상 10월이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이때는 밤낮으로 술 마시며 노래하고 춤추는데 이 행사를 ‘舞天’이라고 한다. 또 호랑이를 신으로 섬기면서 제사를 지낸다.(其俗重山川 山川各有部分 不得妄相涉入 同姓不婚 多忌諱 疾病死亡輒損其舊宅 更作新居 有麻布 蠶桑作緜 曉候星宿 豫知年歲豊作約 不以珠玉爲寶 常用十月節祭天 晝夜飮酒歌舞 名之爲舞天 又祭虎以爲神)
부락 간에 서로 침범하는 일이 생기면 그 벌로 살아있는 소와 말을 바치게 하는데, 이를 책화責禍라고 한다. 사람을 죽이는 자는 그 벌로 사형에 처한다. 도적盜賊이 적다. 길이가 세 길이나 되는 긴 창을 때로는 여럿이 이것을 함께 사용하기도 한다. 보병전步兵戰에 능숙하다. 낙랑군의 단궁檀弓은 바로 이곳에서 산출된다. 바다에는 무늬 있는 물고기 가죽이 산출되고, 뭍에서는 무늬 있는 표범 가죽이 많이 산출된다. 또 과하마果下馬라는 왜소한 말이 산출되는데, 한漢나라 환제桓帝 때에는 이것을 중국에 조공으로 바친 적도 있다.(其邑落相侵犯 輒相罰責生牛馬 名之爲責禍 殺人者償死 少寇盜 作矛長三丈 或數人共持之 能步戰 樂浪檀弓出其地 其海出班魚皮 土地饒文豹 又出果下馬 漢桓時獻之)
(*原註: (一)臣松之按:果下馬高三尺 乘之可于果樹下行 故謂之果下 見博物志‧魏都賦): 신 裴松之가 생각하기에 과하마는 그 높이가 약 90cm로, 이것을 타고 과일나무 아래를 지나갈 수 있기 때문에 과하라고 부른 것 같다. 박물지博物志와 위도부魏都賦에 이에 대한 내용이 보인다.
위魏 제왕帝王의 정시正始(기원204~249년) 6년(기원245년)에 단단대령 이동以東의 예濊가 고구려에 예속된 것을 이유로 낙랑태수 유무劉茂와 대방태수 궁준弓遵이 군사를 일으켜 예濊를 치니 예의 수령인 불내후不耐侯 등이 성읍城邑을 들어 투항하였다. 정시正始 8년(247년)에 그들이 찾아와서 조공을 바치므로, 황제는 다시 조서를 내려서 그들의 수령을 불내예왕不耐濊王에 봉하였다. 이때부터 예왕은 민간에 섞여 거처하면서, 계절마다 郡정부로 찾아와 인사하였다. 낙랑과 대방 두 군에서 군사상 필요에서 인원 징집이나 물자 증발을 하게 될 때에는 예국濊國 사람들에게도 부담시켰는데, 그들에 대한 대우는 관내의 일반 중국 백성들과 똑 같이하였다. (正始六年 樂浪太守劉茂 帶方太守弓遵以領東濊屬句麗 興師伐之 不耐侯等擧邑降 其八年 詣闕朝貢 詣貢拜不耐濊王 居處雜在民間 四時濊濊郡朝謁 二郡有軍征賦調 供給役使 遇之如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