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陳壽의 東夷族 見聞錄 (2부)
23/03/11 16:57:36 김종국 조회 3634
제2부
부여사람들은 특히 제사에 쓸 가축을 잘 기른다. 名馬와 붉은 옥 및 담비와 원숭이 그리고 아름다운 진주가 난다. 진주 가운데 큰 것은 멧대추만 하다. 병기는 주로 활과 화살 및 칼과 창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집집마다 모두 갑옷과 병기를 가지고 있다. (其國善養牲 出名馬‧赤玉‧貂狖(초유)‧美珠 珠大者如酸棗 以弓矢刀矛爲兵 家家自有鎧(개)杖)
 
부여국의 늙은이 들은 스스로 말하기를 자신들은 옛날에 도망쳐 나온 사람들이라고 하였다. 성城마다 울타리는 모두 둥글게 만드는데, 그 모양이 마치 감옥과 비슷하다.(國之嗜老自說古之亡人 作城柵皆員 有似牢獄)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들 길을 다닐 때는 밤에든 낮엔들 노래를 부르는데, 노래 소리가 하루 종일 끊이지 않는다. (行道晝夜無老幼皆歌 通日聲不絶)
전쟁을 앞두고 군사를 움직일 때에도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소를 집아 그 발굽을 관찰하여 길흉을 점친다. 굽이 가라져 있으면 凶한 것으로 여기고 합쳐져 있으면 吉한 것으로 여긴다. 적이 쳐들어오면 여러 ‘加’들은 모두 자발적으로 나가서 싸우고, 민가에서는 양식을 날라 군사들에게 공급한다.(有軍事亦祭天 殺牛觀蹄以占吉凶 蹄解者爲凶 合者爲吉 有敵 諸加自戰 下戶俱擔糧飮食之)
 
사람이 죽으면 여름에는 모두 얼음을 사용하여 냉동시킨다. 산 사람을 죽여서 죽은 자와 함께 묻는데, 순장자殉葬者가 많을 때는 100여명이나 된다. 후하게 장사 지내지만 겉 널(槨)은 있어도 속 널(棺)은 없다. (其死 夏月皆用氷 殺人殉葬 多者數百 厚葬 有槨無棺)(원주: <魏略>에 이르기를 부여의 풍속에는 죽은 후 다섯 달이 지나서 매장하는데, 매장을 늦게 할수록 성대한 장례로 여긴다. 죽은 사람을 제사지내는 경우 그 제사음식은 날 것도 있고 익힌 것도 있다. 상주는 매장을 빨리 하고자하지 않으나 다른 사람들이 빨리하도록 강요하여 언제나 서로 끌고 당기면서 다투는데, 부인은 얼굴가리개 베옷을 입으며, 고리나 패물을 떼어 놓고 차지 않는데, 이것은 대체로 중국의 風俗과 비슷하다. ⁕(一) 魏略曰 其俗停喪五月 以久爲榮 其祭亡者 有生有熟 喪主不欲速而他人彊之 常諍引以此爲節 其居喪 男女皆純白 婦人着布面衣 去環珮(패) 大體與中國相彷彿也)
 
부여는 본래 현도군玄菟郡에 소속되어 있었다. 한漢 말기에 공손도公孫度가 요동遼東에서 세력을 떨치며(AD190년) 그 위세로 인근 이족夷族들을 굴복시키니, 부여왕 위구태尉仇台가 다시 요동遼東에 복속되었다. 이 때 고구려와 鮮卑가 매우 강대하였는데, 공손도는 부여가 고구려와 선비 사이에 끼여 있다고 하여 자기 집안 여자를 위구태尉仇台에게 시집보냈다(그리하여 자신이 부여를 편들고 있음을 표시하였다). (扶餘本屬玄菟 漢末 公孫度雄張海東 威服外夷 扶餘尉仇台更俗遼東 時句麗‧鮮卑彊 度以扶餘在二虜之間 妻以宗女)
 
위구태가 죽은 후 간위거簡位居가 왕위를 이어받았다. 간위거에게는 적자嫡子가 없었고 서자庶子로서 마여麻余가 있었다. 간위거가 죽은 후 여러 ‘加’들이 모여서 麻余를 왕으로 옹립했다.(尉仇台死 簡位居立 無適子 有孼子麻余 位居死 諸加公立麻余)
 
당시 우가의 조카로서 위거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는 외교를 주관하는 관리, 즉 대사大使의 직위에 있었다. 그는 재물을 가볍게 여기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베풀기를 좋아 하였음으로 나라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 그는 해마다 위魏나라 경도京都에 보내어 공물을 바쳤다. (牛加兄子名位居 爲大使 輕財善施 國人附之 歲歲遣使詣京都貢獻)
 
帝王 芳의 正始(기원240년~249년) 연간에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이 고구려를 토벌하면서(기246년, 고구려 동명왕 20년) 현도태수 왕기(王頎)를 부여로 파견하자, 위거位居는 대가大加를 보내어 교외에서 영접하고 군량을 공급해 주었다. 그는 숙부叔父인 우가牛加가 반역할 마음을 품고 있어서 간위거簡位居는 숙부와 그 아들을 죽이고 그 재산을 몰수한 후 사람을 보내어 시신을 대충 처리한 후 관청에 보내게 하였다. (正始中 幽州刺史毌丘儉討句麗 遣玄菟太守王頎詣扶餘 位居遺大加郊迎 供軍糧 季父牛加有二心 位居殺季父父子 籍沒財物 遣使簿斂送官)
 
옛 부여의 풍속에 홍수와 가뭄으로 수확이 줄면 언제나 그 책임을 王의 잘못 탓으로 돌렸는데, 어떤 사람들은 마땅히 국왕을 바꿔야 한다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마땅히 국왕을 죽여야 한다고 하였다. 마여麻余가 죽었을 때 그의 아들 의려는 여섯 살 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죽여야 한다고 하였다. 마여麻余가 죽었을 때, 그의 아들 의려依慮가 여섯 살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즉위하여 왕이 되었다.(舊扶餘俗 水早不調 五穀不熟 輒(첩)歸咎於王 或言當易 或言當殺 麻余死 其子依慮年六歲 立以爲王)
 
한漢나라 때, 부여 국왕이 죽으면 금실로 옥을 엮어서 만든 옷(玉衣), 즉 옥갑玉匣을 입혀서 매장하였으므로, 항상 그것을 미리 마련하여 현도군玄菟郡에 비치해 두었다가, 왕이 죽으면 곧 그것을 받아가서 매장을 하였다. 공손연公孫淵 이 죽임을 당하였을 때(기원 238년, 고구려 東川王12년) 현도군의 창고에는 그때까지 옥갑 한 벌이 있었다. 지금 부여의 나라에는 옥벽(玉璧)‧珪‧瓚 등 여러 代 동안 전해온 옥기들이 있는데, 그것들은 대대로 국보로 여기고 있다. 노인들은 말하기를, 그것들은 모두 선대로부터 하사下賜받은 것들이라고 하였다.(漢時 扶餘王葬用玉匣 常豫以付玄菟郡 王死則迎取以葬 公孫淵伏誅 玄菟庫猶有玉匣一具 今扶餘庫有玉璧珪璨數代之物 傳世以爲寶 耆老言先代之所賜也)
 
<위략魏略>에서 이르기를, 그 나라의 번성과 부유함은 선대 이래로 파괴된 적이 없었다고 하였다(魏略曰 其國殷富 自先世以來 未嘗破壞).
 
부여국의 인장에는 ⌜예왕지인濊王之印⌟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고, 국내에 에성濊城이란 이름의 옛 성이 있는데, 아마도 본래는 예맥穢貊의 땅이었는데 부여가 그곳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생각된다. 부여 사람들이 스스로 ⌜망명자亡人⌟라 부르는 것을 아마도 그리한 이유에서일 것이다.(其人文言 ⌜濊王之印⌟ 國有故城言濊城 蓋本濊貊之地 而扶餘王其中 自謂⌜亡人⌟ 抑有(以)似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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