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陳壽의 東夷族見聞錄(1부)
23/03/09 16:36:22 김종국 조회 28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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陳壽의 東夷族見聞錄(1부)
                                              掌議 金 鍾國
 
머리말
구당(矩堂) 유길준(兪吉濬)은 최초의 관비(官費) 유학생으로 일본, 미국, 유럽, 동남아시아를 둘러보고 [서유견문西遊見聞]이라는 최초의 국한문(國․漢文) 혼용의 西洋見聞錄으로 구미(歐美)와 도암아(東南亞)를 조선(朝鮮)에 알렸다. 하멜은 풍랑(風浪)을 만나 제주에 도착해 제주도, 한양, 강진 등지를 배경으로 ‘하멜표류기’를 써 朝鮮을 유럽에 알렸다.
박지원(朴趾源)은 열하일기(熱河日記)에서 홍대용(洪大容)은 담헌외서(湛軒外書)에서 산해관(山海關)과 만리장성(萬里長城) 등을 보고 중국(中國)을 우리에게 알렸다. 이들보다 아주 일찍 서진(西晉)의 진수(陳壽,기원233~297)는 부여(扶餘), 고구려(高句麗), 옥저(沃沮), 삼한(三韓) 등지를 다니며 우리의 조상(祖上) 동이족(東夷族)이 살았던 지역을 두루 보고 기록한 【삼국지三國志 위서동이전魏書東夷傳】을 썼다. 【삼국사기三國史記】나 【삼국유사三國遺事】보다 약 900년 앞서서 우리 조상들의 나라에서 동이족의 삶을 살펴 적었기에 ‘진수陳壽의 동이족견문록東夷族見聞錄’이라 이름 하여 간추려 소개하고자 한다. <위서魏書>를 흔히 우지(魏志)라고도 하여 위지동이전(魏志 東夷傳)이라고도 부른다. 한반도(韓半島) 일대에 나타난 고대 국가들에 관한 가장 오랜 기록 가운데 하나이며, 각 국가의 제천의식(祭天儀式)이나 풍속(風俗) 등에 관해 비교적 자세한 기록이 전해져 한반도의 고대사(古代史) 연구에 중요한 사료(史料)로 쓰이고 있다. 진수(陳壽)가 여행하며 적은 시기는 대략 기원 280~289년으로 잡고 있다. *역자 註는 박기봉의 註를 의미한다.
 
1. 부여扶餘
부여(기원전 3세기~기원494년)는 고조선 후기인 위만조선 시기에 고조선북쪽에 자리하면서 중국 한漢과 밀접하게 교류했다. 고구려에 의해 멸망되기 전까지 외국과의 전쟁 없이 약 7백년의 역사를 가진 국가다.(송호정의 ‘처음 읽는 부여사’에서)
扶餘
장성長城의 북쪽에 있고, 현도군(玄菟郡현토군이라 쓰고 현도로 읽는다.)에서 1천리 떨어져 있으며, 남南으로 고구려와 동東으로는 읍루挹婁와 서로는 선비鮮卑와 접해있고, 북쪽에는 약수弱水가 있다.(*弱水:流經省份: 青海省,甘肅省,内蒙古自治区, 全長 821km, 别稱 黑河,甘州河) 사방 약 2천리 가량 된다. 인가人家는 약 8만 호이며, 사람들은 한 곳에 정착해 살고, 창고와 감옥이 있다. (扶餘在長城之北 去玄菟千里 南與高句麗 東與挹婁 西與鮮卑接 北有弱水 方可2千里 戶八萬 其民土著 有宮室ㆍ倉庫ㆍ牢獄)
(*역자주: 弱水: 강이름,<아리수>古代에는 아리수가 여러 개 있었는데, 이곳 약수는 흑룡강을 의미한다.) 궁실宮室=집이란 뜻이다. 현도군은 한 무제漢 武帝가 설치한 한사군漢四郡의 하나다.)
부여扶餘의 지경地境 안에는 산이 많고 광대한 저지대가 있으며, 동이족東夷族의 여러 나라들 가운데 지세가 가장 평탄하고 확 트인 지역이다. 토지는 오곡五穀(마麻, 메기장黍, 차기장稷, 보리麥, 콩荳)의 재배가 알맞은 곳이나, 다섯 종류의 五果(복숭아桃, 오얏李, 살구杏, 밤栗, 대추棗)는 나지 않는다. 부여 사람들은 덩치가 크고, 키도 크며 성격은 강하고 성격이 강하고 용맹하고 부지런하고 진중鎭重하며 남의 재물을 빼앗지 않는다.
(多山陵 廣澤 於東夷之地域最平敞 土地宜五穀 不生五果 其人麤(추)大 性强勇謹厚 不寇鈔)
나라에는 君王이 있고, 관직명은 모두 여섯 종류의 家畜名으로 되어 있는데 馬加, 우가牛加, 저가豬加, 구가狗加, 대사大使, 대사자大使者,사자 使者 등이 있다. 사람들이 사는 부락에는 재력 세력을 가진 호민豪民이 있으며, 그들 아래 붙어있는 자들은 모두 그들의 노비奴婢나 종들이다. 가加란 명칭이 붙은 관리들은 각지의 일들을 관장하는데, 그 행정구역을 ‘도道’라 부른다. 대도大道의 경우는 수천가數千家를 , 작은 경우 수백가數百家를 관장한다.(國有君王 皆以六畜名官 有馬加‧牛加‧豬加‧狗加‧大使‧大使者 ‧使者 邑落有豪民 名下戶皆爲奴僕 諸加別主四出道 大者數千家 小者數百家)
 
먹고 마실 때에는 모두 조俎와 두豆란 그릇을 사용하고, 임금과 신하들이 정기적定期的으로 모임을 갖고 모여서 연회를 베풀 때에는 배작拜爵, 세작洗爵 등의 의식을 행하며, 나아고 물러날 때, 올라가고 내려올 때 읍揖을 하여 공경의 뜻을 표시하고 서로 겸양하는 종류의 의식과 예절을 행한다.(飮食皆用俎豆 會同‧拜爵‧洗爵 揖讓昇降) * 拜爵: 군신들이 모여서 연회를 할 때 술잔을 받으며 잔을 들어 절을 한 다음 마시는 행동. 洗爵: 연회 도중에 잔을 받아 마신 후에는 다시 잔과 손을 씻은 후 다음의 잔을 받는 의식)*향교의전에서 마주보고 相揖하는 예가 扶餘 때부터 행하여 졌음을 알 수 있다.
은력殷曆으로 정월(지금의 12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이때 나라 안에서는 큰 집회를 열고 연일 마시고 먹고 노래하고 춤을 추는데, 이 행사를 ‘영고迎鼓’라 부른다. 이 기간 중에는 죄인들의 형을 판결하고 감옥에 갇혀 있던 죄수를 풀어준다. (以殷正月祭天 國中大會 連日飮食歌舞 名曰迎鼓 於是時斷刑獄 解囚徒) *은殷나라는 성姓씨를 자子로쓰는 동이족東夷族의 나라여서 부여扶餘도 은력殷曆을 쓰고 흰 옷 입기를 즐겨했으니 백의민족白衣民族의 특징이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부여 사람들은 흰 옷을 즐겨 입는데, 사람들은 흰 천으로 만든 큰 소매의 웃옷과 바지를 입고, 가죽신을 신는다. 외국에 나가는 경우에는 비단 모직물로 만든 옷을 즐겨 입는데, 대인大人들은 여우나 흰 원숭이, 또는 검은담비의 모피로 만든 모피 옷을 위에 걸치고 모자는 금, 은으로 장식한다. 통역인이 말을 통역할 때에는 모두 무릎을 꿇고 손을 땅에 짚고 낮은 소리로 말을 한다. (在國衣尙白 白布大袂(몌)袍袴(고) 履革鞜(탑) 出國則尙繪繡錦罽(계) 大人加狐狸‧貁(유)白‧黑貂之裘(구) 以金銀飾帽 驛人傳辭 手據地竊語)

형벌을 시행함에 있어서는 엄하고 가혹하다.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고 그 집안사람들을 노비로 삼는다. 도적질을 하면 벌로 그 훔친 물건의 열두 배 를 배상해야 한다.( 用刑嚴急 殺人者死 沒其家人爲奴婢 竊盜一責十二)
 
남녀가 음행淫行을 하거나 부인이 투기를 하면 모두 죽인다. 특히 투기 하는 것을 증오하여 투기하는 부인을 죽이고 난 후에도 그 시신을 남쪽 산위에 갔다버려 썩어 문드러지게 한다. 여자의 집에서 시신을 거두려면 관청에 소와 말을 바쳐야만 시신을 건네준다.(男女淫 婦人妒(투) 皆殺之 尤憎妒(투) 已殺 尸之國南山上 至腐爛 女家欲得 輸牛馬乃與之)
형이 죽으면 아우가 형수를 아내로 삼는데, 이 풍속은 匈奴와 같다.(兄死妻嫂, 與匈奴同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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