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들이 쓰던 글귀
掌議 金鍾國
1. 들어가며
세종대왕이 창제하여 훈민정음을 반포되기 전 우리의 선조들은 문서를 어떻게 작성하였는지를 알기위해 이두에 관한 서적을 통해 시대별로 정리해 보았다. 훈민정음이 반포된 후에도 吏讀는 계속 사용되었음을 여러 문헌에서 찾을 수 있었다. 이두를 알고 싶어 南豊鉉의 ‘吏讀硏究’과 朴盛鍾의 ‘조선시대 고문서 吏讀文’ 역주를 참고하여 고조선 시대부터 조선조까지 나와 있는 吏讀文을 단편적으로나마 정리하여 이글을 쓴 것이다. ‘吏讀’ 를 나름대로 풀어써 ‘관리들이 쓰던 글귀’로 개칭하여 제목으로 삼았다. 이두를 ‘이두연구’에서는 다음과 같이 정의 하였다.
2. 吏讀, 鄕札, 口訣의 槪念과 表記法
한자를 빌어 우리말을 기록하던 표기법을 借字表記法이라 한다. 이 자료는 三國時代부터 朝鮮朝 말까지의 것이 전하고 있다. 이와 같이 오랫동안 사용되어 오면서 표기법상 여러 변천상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 사용범위를 중심으로 이를 분류하면, 吏讀, 鄕札, 口訣, 固有名詞表記(語彙表記)로 나뉜다.
이두란 말에는 廣義와 俠義 두 개념이 있다.
* 광의의 이두: 俠義의 吏讀 + 鄕札+ 口訣 + 固有名詞 表記
* 협의의 이두: 吏讀文에 쓰인 우리말
『大明律直解』에서 薛聰이 지은 方言文字를 吏道(吏讀)라고 한다‘고 한 것이 이를 말하는 것인데, 李承休의『帝王韻紀』에서 ‘설총이 이두를 지었다.’훈민정음의 정인지 서문에서 ‘薛聰이 吏讀를 처음 만들었다.’고 한 것도 이두를 廣義의 槪念으로 사용한 것이다. 『三國史記』에는 ‘설총이 우리말로 九經을 읽었다’고 하였고, 『三國遺事』에서도 ‘薛聰이 우리말로 중국과 우리의 민간에서 사용하는 物名들을 이해할 수 있게 하였고, 六經文學을 訓解하였다’고 하였다. 이는 설총이 그의 학문을 借字표기로 기록함으로써 그 발달에 공헌하였던 것을 말한 것으로 이해되는데 후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설총이 이두를 지었다고 한 것은 이두와 차자표기를 같은 것으로 본데서 나온 것으로 본다.
우리 선인들이 文字生活을 漢文과 國語 문장으로 兩分하면 순수 국어 문장표기를 지향하는 것이 鄕札이고, 이보다는 한문적인 성격을 지향하거나 그에 依支하려는 경향을 띠는 것이 吏讀라 할 수 있다. 吏讀는 三國時代부터 근대까지 사용되었지만, 鄕札은 統一新羅時代에 完成되어 사용되다가 한글 創製 後는 현저히 쇠퇴하였다. 口訣은 한문 원전이 있고 여기에 吐를 단다는 특징이 있어 잘 구별된다.
鄕札이란 명칭은 『均如傳』에 오직 한 번밖에 사용되지 않은 것이다. 崔行貴가 균여의「普賢十願歌」한역하기 위하여 평하면서 「普賢十願歌」와 같은 우리말의 문장을 鄕札이라 한 것이 그것이다.
鄕札을 국어사전에서는 ‘신라 때, 한자의 음과 훈을 빌러 우리말을 表音式으로적던 표기법. 특히 鄕歌의 표기에 쓴 것을 이름’이라 했다. 鄕歌는 ‘신라 중엽에서 고려 초엽에 걸쳐 민간에 널리 퍼졌던 우리 고유의 시가로 『三國遺事』에 14수, 『均如傳』에11수, 高麗中期의 예종 때 「悼二將歌」를 더해 모두 26수가 鄕札로 적혀 내려옴’이라고 정의 했다.
3. 假借表記法의 文字體系
文字體系의 원리는 크게 두 가지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진 것이다.
1) 한문의 학습방법에서 얻어진 원리
한문을 새기는 방법이 체계화되면 한자에 제한된 범위에서의 훈을 부여하게 된다. ‘天’에 대하여 ‘하’, ‘地’에 대하여 ‘ㅎ’와 같은 것이 그것이다. 그리하여 漢字를 音으로 읽는 방법과 訓으로 읽는 방법이 성립되어 이 음과 훈이 借字表記法의 문자 체계를 이루는 原理가 된다.
2) 우리말을 표기하기 위해 한자를 이용하는 과정에서 얻어진 원리
우리말을 표기하기 위하여 이용하는 방법은 다시 표의문자와 표음문자로 나뉜다. 전자를‘讀 ’의 원리, 후자를‘假’의 원리라 한다.
漢字는 音과 訓으로 나누고 音을 다시 音讀字와 音假字로 나눈다. 또 訓을 訓讀字와 訓假字로 나눈다.
* 音讀字: 한자를 음으로 읽으면서 그 表意性을 살려서 이용한 借字
* 音假字: 한자를 음으로 읽되 그 表意性을 버리고 表音性만 이용한 借字
* 訓讀字: 한자를 훈으로 읽으면서 그 表意性을 살려서 이용하는 借字
* 訓假字: 한자를 훈으로 읽되 그 表意性을 버리고 表音性만 이용하는 借字
이 가운데 音讀字와 訓讀字를 묶어서 讀字(表意字)라 하고, 音假字와 訓假字를 묶어 假字(表意字)라고 하는 것이 편리할 때도 있다.
* 音讀字는 漢文에서 漢字의 用法과 같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말의 표기에 사용된 것이라고 보면 이는 우리말에 들어온 漢語借用語의 표기다. 한글과 漢字를 혼용하는 現代國語의 글에서 한자어를 표기하는 한자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쉽다. 이 한자어는 漢語에서 사용한 것도 있지만, 국어 안에서 조어된 것도 있음을 고금이 같다. 우리말에 사용되는 한자어는 한문의 용어 그대로가 아닌 제한된 범위에서의 借用이므로 音讀字의 수가 한문에서 사용되는 한자의 수보다 적다고 하겠다.
* 訓讀字는 한문의 단어에 해당하는 한자에 국어의 훈(새김)이 대응하는 범위에서 사용되는 借字이다. 두 언어 간의 대응은 일상 언어에서는 쉽게 이루어지지만 중국어의 특수한 개념을 나타내는 한자는 국어에는 대응하는 훈(새김)이 없음으로 이러한 한자는 訓讀字로 쓰일 수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훈독자의 數는 音讀字의 수보다 제한된다고 하겠다. 訓讀字 가운데는 한 글자가 여러 훈으로 읽힐 수도 있고, 여러 글자가 같은 훈으로 읽히는 것도 있다.
* 音假字란 한자의 形成原理인 六書 가운데 假借의 원리를 빌려온 것이라 할 수 있다. 後期中世國語 시대의 구결에 쓰인 音假字는 순독구결을 중심으로 하여 조사된 것이지만, 통일신라시대나 고려시대의 吏讀나 鄕札은 석독구결을 배경으로 한 것으로 믿어지므로 訓假字의 수가 이보다 증가할 것이다. 『鄕藥救急方』의 鄕名表記에 차용된 音假字 수는 단어의 수가 적음에도 불구하고 111자가 사용되었다. 音假字는 단음절어를 표기하는 한자의 특성으로 인하여 원칙적으로 音節文字이다. 다만 우리밀의 음절말자음을 표기하기 위하여 사용되는 것에 只(ㄱ), 隱(ㄴ), 乙(ㄹ), 音(ㅁ) 叱(ㅅ)이 있어, 이것이 음절문자성을 벗어나는 것이다. 音假字자에는 같은 음을 표기하기 위하여 서로 다른 글자가 사용되는 예가 흔히 있다. ‘鄕藥救急方’에 보면 古 高 苦가 ‘고’음의 표기에 包 苞 甫 鮑가 ‘보’음의 표기에 쓰였다. *六書: 象形文字, 會意文字, 指事文字, 形聲文字, 會意文字, 假借文字
*訓假字는 訓讀字에서 발달한 것이다. ‘以’자는 한문의 介詞로서 국어의 조격조사 ‘~ 로’를 표기하는데 주로 쓰인다. 이는 한문의 원뜻에 따라 쓰인 것이므로 훈독자이다. 鄕藥救急方에선‘加’音假字로선 ‘가’, 訓假字로선 ‘더’음의 표기에 쓰인다. ‘耳’도 音假字로선 ‘’훈가자로선 ‘귀’로 읽히고 있다. 音讀字, 音假字, 訓讀字, 訓假字에 대한 정의를 알아보았으니, 각 시대별 ‘나리들이 쓰던 글귀’의 자료를 보자.
4.시대별 吏讀의 자료
1) 고조선 시대
檀: 박달 박, 호수 달 檀君: 박달의 부족장
王儉: 임검(임금)
阿斯達: 궁전이 있는 산(阿斯: 궁전 達: 산)
공후인(箜篌引): 중국 晉나라 해제 때 崔豹가 편찬한 古今注에 전해옴
뱃사공 곽리자고(霍里子高)의 아내 여옥이 작곡
“公無渡河: 님아 강을 건너지 마오.
公竟渡河: 님은 기어이 강을 건너네.
墮河面死: 물에 빠져 돌아가시니
當奈公何: 아아, 님아 이를 어이하리.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이덕일, 김병기 공저 179~180쪽>
뱃사공 곽리자고(霍里子高)가 어느 날 새벽 나룻배를 저어 강을 건너는데 백발노인이 미치광이처럼 머리를 풀어헤치고 한 손에는 술병을 들고 강물에 뛰어들어 물살을 헤치며 강을 건너려하였다. 이때 그의 아내인 노파가 그를 쫓아 강물에 뛰어들며 한사코 건너지 말라고 만류하였으나 노인의 그냥 강 가운데로 들어가 그만 물에 빠져죽고 말았다. 눈앞에서 남편을 강물에 떠내려 보낸 노파는 기가 막혀 통곡을 하며, 손에 들었던 공후라는 악기를 타며 슬픈 노래를 부른 후 남편의 뒤를 따라 강물에 몸을 던졌다.
이 광경을 본 격리자고는 집에 돌아와서 자기 아내 麗玉에게 그 광경을 이야기 하였다. 여옥은 노인부부의 죽음을 슬퍼하여 공후를 타며 그 슬픔을 노래하였다. 이 노래를 필자는 귀하게 얻은 고조선 시대의 문장으로 고조선의 이두문이라고 단정할 수 없겠지만 귀한 자료여서 함께 실었다. 위의 詩歌는 중국 晉나라 惠帝(재위BC650~637) 때의 사람 崔豹가 편찬한 고금주에 전해온 것이다.
*고조선은 일찍부터 중국과 활발한 문화교류를 가졌다. 『후한서』「열전」등의 기록을 보면 중국의 『詩經』,『書經』,『春秋』등이 古朝鮮에 유입된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고조선 지식인들이 漢文을 이해 할 수 있었음을 뜻한다. 북한 학자들은 이에 근거하여 고조선 사람들이 기원전 8세기 이전에 한자를 사용하기 시작해 널리 보급됐다고 주장한다. 근래 경남의령군 다호리의 기원전 2세기 무덤에서 청동기․ 철제도구 등과 함께 붓 5자루가 출토되었는데, 이는 중국 한나라 때 사용한 것과 동일한 것이다.
2). 고구려 시대
고구려 6대 태조왕과 7대 차대왕 때의 제도에 나타난 이두
(1) 제상 세 사람
‘신가’ -太大臣이라는 뜻, 이두자로: 對盧, 한문으로: 國相, 大輔
‘팔치‘ -팔꿈치(肱)라는 뜻 이두자로: 評者. 한문으로: 左輔
‘발치’ -정강이(股)라는 뜻 이두자로: 沛者. 한문으로 右輔
참고 문헌: 三韓古記, 海東古記, 高句麗古記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무질서하게 표현함
(2) 全國을 5부로 나눈 이름과 관리자
동부 → 순라 吏讀字 →順那 :
(‘라살’이라는 관리가 관할, 이두로
서부 → 불라 “ → 灌那(관라) ‘누살耨薩’한문으로 ‘道使)’
남부 → 열라 “ → 椽那 (연라)
북부 → 줄라 “ → 絶那 (절라)
중부 → 가우라 “ → 桂安那(계아날) ‘신가’가 관할
그 외 도부(圖簿)와 사령을 맡아보는‘일치’, 吏讀字로 ‘乙支’혹은
‘優台’라하고 한문으로 ‘主簿’대왕의 시종을‘살치’이두자로 ‘使者’
(3) 고구려 환도성의 위치변화
제1 丸道城: 太祖王의 王子 遂成(후에 차대왕)이 쌓음: 지금의 開平부근
제2 환도성: 동천왕이 쌓음 지금의 환인부근
제3 환도성: 고국원왕 집안현 紅石項子山
⦿‘곰나루’를 訓으로 쓴 이두자 → 熊津 :백제
⦿‘곰나루’를 音으로 쓴 이두자 → 古莫那羅 (廣開土大王 碑文) :고구려
金異斯夫는 一名 ‘苔宗’이라 하는데, 異斯가 音으로 ‘苔’를, 뜻으로,夫는 七書諺解에 士大夫를 ‘사태우’로 音解하였으니 그 음이 ‘우’이고’, 宗은은 뜻으로 ‘마루’이다. 그러니 이두자 읽는 법으로는 이사부나 苔宗은 ‘잇우’이고, 居柒은 音으로, ‘荒’은 뜻으로‘거칠’을 쓴 것이니, 居柒夫와 黃宗은 ‘거칠우’로 읽는다.
⦿ 윷판이 곧 다섯 가의 出戰圖임
`刀 介 乞 兪 毛 → 이두문자
또 개 걸 윷 모
猪 犬 中 牛 馬
돗가 개가 신가 소가 말가(신가가 中軍大元帥가 되고
前軍, 後軍, 左軍, 右軍의 네 元帥가 되어 출전함)
왕검이 아들 夫婁를 보내어 金簡玉牒의 글을 가르쳐 주었는데,이 글자가 곧 漢字였을 것이니, 조선이 한자를 익힌 것이 이미 오래 되었음을 볼 것이다.
그 뒤 漢字의 음 혹은 뜻을 빌려 이두문을 만들었는데, 이두문은 조선 고대의 국문이라 할 수 있다. 고대에는‘국서’, 향서, 혹은 ‘가명’ 이라 일컫고, 고려조 이후에 비로소 ‘吏讀文’이라 일컬었으나, 이제 통속의 편이를 위하여 고대 것까지 吏讀文이라 하거니와, 흔히 이두문을 신라 설총이 지은 것이라고 하지만 설총 이전의 진흥왕 순수비에도 가끔 이두문으로 지은 시가가 있으니, 설총과는 거리가 멀다. ‘임금’을 왕검이라 번역하여 王은 그 글자의 뜻에서 소리의 절반을 취하여 ‘임’으로 읽고 ‘儉’은 그 글자의 음에서 소리의 전부를 취하여 ‘금’으로 읽으며, ‘펴라’를 ‘樂浪’이라 번역하여 ‘樂’은 글자의 뜻에서 소리의 처음 절반을 취하여‘펴’로 읽고, ‘浪’은 글자의 음에서 소리의 처음 절반을 취하여 ‘라’로 읽는 것이 곧 이두문의 시초이니, 적어도 이제부터 3천년전~기원전 10세기경에 만들어진 것 같다.
(2)시작
(4)廣開土大王碑文
王臨津言曰 我是皇天之子 母河伯女郞 鄒牟王 爲我連葭浮龜
因遺黃龍 來下迎王 王於忽本東岡 黃龍負昇天 이하 생략
왕이 물가에 임해서 말하기를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요 어머니는 하백의 딸이요 추모왕이다. 나를 위하여 葭(갈대 가)를 連하고 거북을 띄우라.
곧 왕을 보내서 내려와 왕을 맞게 하니 왕을 동쪽 언덕에서 황룡이 업고 하늘로 올라갔다.
*광개토대왕비는 당시의 최고 문장가가 썼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비문이 한문에서 보면 어순이나 문법 및 표현이 아주 어색하다. 이러한 점에서 이 비문은 高句麗式 漢文이고 이 한문에는 우리말의 요소인 吏讀的 표현을 섞어 쓰는 당시의 문장 의식이 나타난 것이라 하겠다.(‘이두연구’의 저자 남풍현의 評)
(5)고구려 장수왕 기축년(449년)평양성도 1호의 글
己丑年 五月二十一日 自此以下向東十二里 物省(苟)小兄 排百頭⼞節矣
기축년 5월21일 여기서부터(自此) 아래로(以下) 동쪽을 향하여(向東) 십이
리는(十二里) 물성(物省)출신의 소형(小兄)이고 배백두(排百頭)의 ⼞가 감독하였다.(지었다.) (吏讀硏究의 저자 남풍현의 번역)
* 物省:고구려 시대 관청. 小兄:고구려 시대 12등급의 하나.
* 節矣: 지이-지위- 짓다.
3) 백제의 이두
武寧王陵에서 發見된 팔지의 銘文
‘更子年二月 多利作 大夫人□ 二百主耳’
AD 520년 2월 다리(人名)가 만들었다. 대부인(왕비)의 장신구 (팔찌)는 166g이다. ‘主’는 고대의 무게의 단위로 수(銖는 수는 1냥의 1/24)자를 차용 해 쓰고 있다. 230주=166g
① 이 문장의 어순이 우리말 어순에 따르고 있다.
② 우리가 쓰고 있던 말을 문자로 표현하기 위해 한자를 빌려 썼다.
③ 문장의 맨 끝에 ‘耳’문장 종결사 ~ 이다.
④ □ 대부인 다음 글자는 모양 상 ‘永’으로 보이며 장신구로 연결하여 해석했다. (1971년 발굴한 무녕왕릉에서 발견한 팔찌의 명문)
* 한국기술교육대학교 정재영 국문학과교수의 논문에서 인용
4) 新羅의 吏讀
迎日冷水里新羅碑銘
斯羅 喙 斯夫智王 乃智王 此二王敎 用珍而麻村節居利 爲證爾
令其得財敎耳 癸未年 九月二十五日 斯喙 至都盧 葛文王 斯德智 阿干支 子宿智 居伐干支 爾夫智 壹干支 只心智 干支 本彼部 頭腹智 干支 斯波暮斯智
干支 此七王等共論敎 이하 생략 喙:부리 훼
사라(현재의 경주) 훼부의 사부지왕과 내지왕, 이 두 왕이 명령하였다.
진이마촌 절거리의 권익(주장)을 보증한 것이었다. 그로 하여금 재산을 얻게 한다는 판결(명령)이었다. 계미년 9월25일 사훼부의 지도로 갈문왕 자숙지덕지 훼부의 이지부 일간지 지심지 거벌간지, 본피부의 두복지 간지 사피부의 모사지 이 일곱 왕등(대등/간)이 함께 의론하여 판결(명령)하였다.
* 迎日冷水里新羅碑는 蔚珍鳳坪新羅碑, 丹陽新羅赤城碑와 같은 성질의 비석이다. 세 비가 모두 중앙의 화백회의에서 해당 지역에서 일어난 문제들을 논의하여 판결한 사항을 새기어 세운 비석들이다. 따라서 이 비문들은 당시
행정문서의 문체를 보여 주는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다. 鳳坪碑와 赤城碑는 신라의 변방에 세워진 것이지만, 冷水里碑는 경주에서 가까운 지역에 세워진 것이므로 이로 미루어 보면 이러한 비는 삼국시대의 신라전역에 걸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앞으로도 이 계통의 비가 발견될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1988년 蔚珍鳳坪新羅碑와 明活山城作城碑의 발견에 이어 1989년에 迎日冷水里新羅碑가 발견되었다. 이 비의 연대는 비형태의 古拙함과 비문에 쓰인 煞牛, 世中의 용어가 鳳坪碑와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503년으로 추정하는 것이 무리가 없다. 煞죽일 살, 매우 쇄
5) 高麗時代의 吏讀
醴泉鳴鳳寺慈寂禪師凌雲塔碑 陰銘
(이 첩문은 고려 태조22년(939)에 朝廷(都評省)에서 명봉사에 내린 것으로 현재 전하는 고려시대의 행정문서로 가장 이른 것임)
(1)都評省帖 洪俊和尙 衆徒 右法師
도평성에서 홍준화상 중도의 우법사에게 첩문을 보내어 알린다.
(2)師矣 啓以 僧矣段 赤牙縣 鷲山中 新處所 元聞爲 成造爲內臥乎亦在之白賜
師의 啓에 의하면 僧의 경우에는 赤牙縣의 취산에 신처소를 처음(조정에) 奏聞하여 (寺刹을)조성하고 있는 바이라고 보고하였음.
* 師矣:사의, 啓以: 계로, 僧矣段 :승의단, 赤牙縣:명봉사가 속한 당시의 懸名, 鷲山中:취산에, 元聞爲:처음~ 야, 成造爲內臥乎亦在之:‘성조 누온여겨다’,白賜‘’으로 읽힌다. 白:는 보고하다.賜:로 존대하여 으로 읽음 *鷲독수리 취
(3)懸以 入京爲 使臥 金達舍 進置 右寺 原 問內乎矣 大山是在以 別地主 無亦 在彌 衆矣 白賜臥乎 貌如 加知谷 寺谷中 入 成造爲賜臥亦之 白臥乎 味 及白
현으로부터 입경하도록 부림을 받은 김달사가(도평성에)출두하여 우사의 터에 대하여 묻되 큰 산이므로 따로 지주가 없으며 중(스님들)의 보고하신 모양과 같이 가지곡의 사곡에 들어가 조성하시고 있는 바이라고 사뢰는 뜻을 직접 보고하였음.
* 懸以:‘현으로’, 入京爲:‘입경삼’입경하도록, 使臥: 부리눈, 金達舍:이 시대에는 姓이 사용되지 않고 있어 金達을 이름으로 보고 舍는 舍知의 축약, 관등명으로 생각됨. 進置: '낫두',‘출두하여’右寺 原:절을 지을 언덕이나 빈터. 問內乎矣:물오 問/묻, 乎矣/오, 大山是在以: 大山이견으로, 대산이므로. 別地主 無亦:달리 지주가 없이. 在彌:‘겨며’로 읽히고 ‘있으며’衆矣: 중들의. 白賜臥乎: ‘누온’으로 읽힘, 賜/는 스님의 존대말, 白/: 보고하다. 貌如: ‘즛다히’로 읽히고 訓讀字로 ‘모양’,~하는 모습
白臥乎 味: 온 맛으로 읽히고 ‘보고하옵는 취지’로 해석된다. 及白:‘및’으로 읽히고 ‘직접 보고함’으로 풀이된다.
(4)節中 敎旨 然丁 戶丁矣 地⼞ 知事者 國家大福田處爲 成造爲 使賜爲敎
이 때에 교지가 내렸으니 ‘그러하도다. 호정의 지를 지사자(스님)들이 국가의 대복전처로 삼아(이 복전처를) 조성하기 위하여(사람들을)보내도록 하라’고 명하시었음(가르치시었음)
*節中:‘디위기’로 읽히고 ‘이 때에’뜻이다. 敎旨:이는 왕의 명령(가르 침)이어서 줄을 바꾸고 두 칸을 올려 썼다. 然丁: ‘그러한가’‘그렇구나‘로 해석하면 된다. 知事者: 일을 관장하는 자. 國家大福田處爲: 국가적인 큰 사찰로 삼아. 成造爲:성조하기 위하여. 使賜爲:'브리' 敎: 명하시다.
(5) 天福 四季 歲次 己亥 八月一日 省史 目光
천복은 후진 고조의 연호로 그 4년 기해는 태조22년(939)이다. 省史는 도평성의 문서를 다루는 직책 목광은 省史 직을 맡은 사람의 이름
(6) 五年 辛丑 八月 二十一日 ⼞ 國家以 山院名 幷 十四 州郡縣 契乙 用成造 令賜之
5년(신축년) 8월21일 국가로부터 산과 원의 이름을 내림과 아울러 14주, 군, 현의 계로써 조성시키시었다.
* 十四 州郡縣: 주, 군, 현 모두 합하여 14고을이란 뜻으로 상주 명봉산 경청선원이란 말이 있어 상주에 속했던 고을들이다. 成造 令賜之:‘성조시키다’로 읽힌 것으로 ‘조성시키다’로 풀이된다.
(7) 節 成造使 正朝 仁謙 停勵古寶
이 때 성조사 정조 인겸 정려고보
* 節/디위 ‘이 때’,‘이 임시하여’의 뜻. 成造使: 절을 조성하기 위해 왕명을 받은 사람의 직책명, 正朝: 관등명, 仁謙: 人名 停勵古寶: 분명치 않으나 관인이나 어보를 나타내는 표시라 생각됨.
* 고려시대의 이두문은 현재 60여종이 발굴되어 있다. 이들 가운데 이두문을 해독하여 알기 쉽게 풀이한 것은 몇 되지 않는다.
5) 조선시대의 이두문
(1). 李藝功牌
연대:1421년(세종3.永樂19 )
공을 세운 이예에게 왕명에 따라 발급한 문서로서, 당사자 및 자손들의 役을 면해주는 내용을 담고 있으므로 사패(賜牌)문서에 속한다. 이 문서는 종전에‘李藝鄕吏功牌’라 칭했으나, 이예가 이 문서를 받을 당시에는 이미 관직을 제수 받은 상태였으며, 이 문서에서‘功牌’가 단어로 굳혀져 사용된 까닭에‘이예공패’로 칭하기로 한다.
이예(1373~1445)의 호는 鶴坡이고, 시호는 忠肅이다. 그는 1401년(태종1)에서 1418년(태종18)사이에 13차례 일본과 琉球(지금의 류쿠)에 끌려간 사람들을 데려오고, 對馬島 征伐 때 功을 세웠다. 그는 원래 울산군의 鄕吏 출신이었으나, 관직과 공패를 받는 등의 활동을 통해 울산 이씨의 계파인 鶴城李氏의 中始祖가 되었다. 鶴城李氏族譜에 등재된 문서임.
※이예는 1416년 유구국(琉球國,오키나와)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포로 44명을 찾아왔고, 海東野言에 실린 세종원년 對馬島정벌시에 中軍兵馬副帥使가 되어 李從茂의 대마도 정벌을 도왔던 인물.
①判讀 및 교감(校勘 여러 책을 비교하여 차이 나는 것을 바로잡음)
01 永樂十九年七月十四日功牌
02 右功牌永樂十九年六月十七日兵曹判書臣
03 趙末生敬奉 宣旨奉列大夫禮賓少尹行左
04 軍司直 李藝段去丙子年分蔚山郡事李殷
희
05 亦倭賊亦中被捉時陪記官以官中銀物賚持爲
이 여 로
06 萬戶亦中贈給請還爲乎其志可賞是乎等以用
여 온 이온로
07 良己身免役賞職爲有如乎辛巳年以戊戌年
아 잇다온 로
08 至日本國琉球國良中十三度乙受 命往來
니르리 아
09 交通被擄本國人六百餘名推刷率來爲齊己
져
10 亥年對馬島征討時中軍兵副帥以先鋒指
로
11 路凡事造心使內齊爲等如前後十四度乙不
브리져트러
12 顧死生海外往來爲乎功勞可賞是去有等以
온 이거이신로
13 其矣子孫至亦免役令是良如敎右良如敎事
저의 니르리 이아다이샴니믜아다이샨일
14 是白齊永樂十九年六月二十四日知申事臣
이져
15 金益精敬奉 王旨宣旨內乙用良功牌成給
안아
16 爲只爲下吏曺爲良如敎右良如敎事是去有
기 아다이샴니믜아다이샨일이거이
17 良亦向前 李藝乙良子孫至亦免役向事給
샤금 안전 으란 나르리 안일
18 功牌者 右 敎賜功牌騰傳
② 현대어 번역 및 주석
01 영락 19년 7월 14일(1421년 세종 3) 공패
02 이 공패는 영락19년 6월 17일 병조판서 신
03 조미생(조선 초기 문신)이 삼가 받든 선지(上王인 太宗의 교지)에 이르 되 “봉열대부 예빈소윤 행좌
04 군사직(1396년 태조5년) 이예는 지난 병자년에 울산군사 이은이
05 왜적에게 붙잡혔을 때 배종하였던 기관(吏, 戶, 禮, 兵, 刑, 工의 六房 의 鄕吏層으로 지방 행정의 실무자)으로서 관가의 은물 등을 가지고 위
06 만호(지방의 만호부에 두었던 무관 벼슬)에게 주면서 돌려주기를 정한 그 뜻이 상 줄 만하기에 이로써
07 그 몸은 면역시키고 관직을 상으로 주었던바, 신사년 ~ 무술년에 이르기 까지 (1401년 태종1 ~ 141418년 태종18)
08 일본국과 琉球國에 13번을 왕명을 받들어 왕래하고
09 교통하고 사로잡혔던 본국인 600여 명을 추쇄하여 돌아왔다. 기헤년에 (1419년 태종18) 돌아왔다.
10 대마도를 정벌할 때 중군병마부수로서 선봉에 서 길을 이끌며
11 모든 일에 마음을 썼다.
12 생사를 돌보지 않고ㅡ해외에 왕래한 공로가 분명히 상 줄 만 하므로
13 그의 자손에 이르기까지 면역시켜라.” 고 하심❴으로써❵. 이와 같이 교시하신 일
14 이다. 영락 19년(1421년 세종3) 6월 24일 지신사 신
15 김익정(조선 초기 문신)이 삼가 받든 왕지에 이르되, “선지 내용으로써 공패를 만들어
16 주도록 이조에 내리라.”고 하심으로써 이와 같이 교시하신 일이 분명히
17 있기에 앞의 이예는 자손까지 면역을 처리 할 것이며 ❴이에❵
18 공패를 준다. ‘이상은 임금께서 사급하신 공패로서 배껴 전함.’
@3부시작
(2)이징석사패(李澄石賜牌)
연대: 1433년(세종15,宣德8) 문화제 지정 보물 제1001호. 경남 양산군 하북면 양산이씨 종손가에서 소장한 문서 중의 하나. 변방을 침입하여 군민을 노략 살해하던 婆猪江의 야인들을 참획한 공로로 資憲大夫知中樞院事 이징석에게 奴婢 六口를 내린 문서이다.
수취자인 이 징석은 1373년(공민왕22)生으로서 호는 鷲峰이고, 양상군에 봉군되었으며 시호는 莊剛이다. 그는1458년(세조4)4월에 또 한 차례 佐翼功臣으로서 노비를 사급받는 내용의 사패를 받는다. 그런데 이 사패문서의 전문은 순한문으로 되어 있어, 이두문으로 작성된 본문서와 대조를 이룬다.
이두자 중에는 우선‘爲在(제 3행)이 야인을 수식하고 있는 것이 눈에 뛴다. ‘爲臥乎事是等’(제8행)에서의 ‘時等’, 그리고 ‘爲良如交’(제9행)의 ‘敎 ’로써 본문을 끝맺는 용법 등이 나타난다. 7
①判讀 및 校勘
01 賜
02 資憲大夫知中樞院事 李 澄石
03 卿矣段邊境入侵軍民擄掠殺害爲在婆猪江野人等
의단 견
04 乙都節制使崔閏德指揮從同心協力有能斬獲爲乎
온
05 其功可尙是乎等用良都官婢初生年三十八龍仁接同同婢
이온 아
06 仍邑莊年十七梁山郡婢於衣加年二十六昌原府婢菊花
07 年三十二安城接典農寺奴小斤吾未年十八利川接同寺婢
08 佛明年二十一幷六口乙賜給爲臥乎事是等後所生幷以
을 누온 일이든 아오로
09 子孫傳持永永使用爲良如數
아다 이샴
10 宣德八年六月二十七日敬奉
11 敎旨
12 知申事通政大夫經筵參贊官兼尙瑞尹修文殿直提學知製 敎充春秋館修撰官兼 判奉常寺事知吏曹內侍茶房事臣安 ⌜着名⌟
② 현대어 번역 및 주석
01 자헌대부 지중추원사 이 징석에게
02 사급하시노니
03“경의 경우에는 변경에 침입하여 군민을 노략 살해하여 있던 파저강의 야인들
04 을 도절제사 최윤덕의 지휘에 따라 마음을 합하여 협력하고 참획을 잘 한
05 그 공이 숭상할 만하기에 이로써 도관의 계집종인 초생(나이 38),용인에 거주하는 동동의 계집종
06 내읍장(나이 17), 양산군의 계집종인 어의가(나이 26), 창원부의 계집종 국화
07 (나이 30), 안성에 거주하는 전농사의 사내종 소근오미(나이 18), 이천 에 거주하는 동사의 계집종
08 불명(나이 21) 등 모두 6口를 사급하는 일이니, 後所生과 아울러
09 자손에게 전하여 지녀 영원히 사용하여라.”고 하심〔이다〕.
10 선덕8년 6월27일(1433년 세종 15)에 삼가
11 교지를 받음
12 지신사 통정대부 경연참찬관 겸상서윤 수문전직제학 지제교 충춘추관수 찬관 겸판봉상사사 지이조내시다방사 신 안 ⌜착명⌟
(3) 金宗直母朴氏簡札 연대:1468년, 所在: 慶北 高嶺郡 善山金氏 門中
①해제
金宗直의 母 朴氏가 김종직에게 보낸 간찰이다. 경상북도 고령의 선산 金氏門中소장이며, <嶺南古文書集成(1)>142쪽에 영인 수록되어 있다.
士大夫의 簡札은 거의 대부분 한문으로 작성되어 있는데, 간혹 ‘捧上, 次知’ 등의 한국한자어 및 고문서 용어들이 사용되는 수가 있다. 그러나 이두의 문법 형태가 간찰 안에 사용되는 경우는 발견하기 힘들다. 여기에 소개하는 이 간찰은 비록 사대부기 직접 작성한 것이 아니라 사대부 집안의 여자들이 작성한 것이나, 이두의 문법 형태 표기가 나타난다는 점에서 극히 예외적이고 주목되는 자료다. 문장의 종류는 다른 簡札類와 마찬가지로 순한문을 가조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두문에 흔히 쓰이는 한자어 및 이두토가 간헐적으로 나타난다. 이두로서는 ‘爲在果(제 5행)과 爲如乎(제7행) 등이 사용되었다.
② 현대어 번역 및 주석
01 校理에게 부치는 平書 『圖書』삼가 封함
02 요즘에 〔너의〕
03 安否를 살피지 못해 걱정하던 때에 記官인 仲倫이이가 가져온 글월 의 내용으로 써 이에 〔너의〕
04 安否를 알게 되니 매우 기쁘다. 이 곳은 〔너의〕
05 念慮 그간 걱정이 없었는데, 이 달 11일 종이로 만든 신 네 컬레, 가을 用 철력⁸과
06 바지, 명주 두 필을 도둑맞았다. 이런 까닭에 바지와 철력은 준비하지 못했다.
07 月村에서 23일에 新官을 맞이한 逢從馬로 부쳐 보낸다하니 찾아서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전에 없이.
08 편하고 즐겁게 벼슬살이하기를 기원하며 이만 줄인다.
09 戊子年(1468년) 10月26日 어미 朴氏 『圖書』
10〔追伸〕千同氏의 孫子인 鳳山이 무명을 이미 본래대로 돌려주었다.
③ 판독 및 교감
01 校理寄 平書 『印』 謹封
02 此間未審
03 安否分別此記官仲倫持來書內乃知
04 安否遙喜 〃 此處因
05 念時無恙爲在果今月十一日鍾伊鞋四足甫天益
견과 보라 텰릭
06 波池綿紬二疋乙逢賊玆故波池天益未及准備月
바지 을 바지 텰릭
07 村卄三日新官迎逢從馬付送爲如乎推尋捧上爲可未前
다온 받자
08 如祝安樂從仕只此
09 무자십월26일모박 氏 「圖署」
10 千同(人名)氏孫鳳山木綿已還本
(4) 옛날 우리나라에서는 사방 경계에 대한 표시의 뜻으로 사표(四標)라는 말이 사용되었는데 사지(四至)와 같은 말이다. 예를 들어 옛날 토지매매 문건을 보면 매매 목적물을 특정하기 위해 사표라는 말이 꼭 들어갔다.
예를 들어 보면 밑줄 친 부분은 이두로 써 있다.
"光緖十六年 庚辰十一月 日 處明文:右明文事段移置次,自己買得田在威化面,
下端員奈字行, 東二十七田, 一日耕。四標段, 東車益煥田, 南賣州田, 西車益煥田, 北賣主垈田, 四標分明,遂如價折則, 錢文一百二十兩,準計俸上是遣,
本文記段, 都文記中故周爻背爲去乎 。日後彼此雜談隅是去等,持此文記, 貌如告官卞政事。
自筆田一行放賣主 申雲祥 (압)
間人 金守得 (압) "
이를 오늘날의 말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광서 16년 경진 12월 일 ×× 아무개한테 증서
상기 증서 하는 일로 말하면 옮기어 살 요량으로 자신이 산 밭, 위화면(威化面) 하단 둘레 내(奈)자 줄의 동쪽 27 밭 하루갈이이다. 사표(四標)로 말하면, 동쪽은 차익환(車益煥)의 밭, 남쪽은 판 임자(賣主)의 밭, 서쪽은 차익환(車益煥)의 밭, 북쪽은 산 임자(買主)의 터와 밭, 사표를 분명히 해서 값을 정하기는 돈 120량인바 따져서 받아들이고, 원 문서로 말하면 전체 문서 가운데 들기 때문에 꺽자를 쳐서 그 후문에 사유를 기록한다. 이 뒤에 피차 딴 소리하는 구석이 있거든 이 문서를 가지고 고대로 관청에 고소해서 핵변한 일.
자필 밭 한 줄을 판 임자 신 운상 수결
중개인 김수득 수결
*光緖(광서): 1875년~1908년으로 高宗16년에 해당
[출처] 중국 하광악(何光岳)의 《동이원류사(東夷源流史)》에서 말하는 해양 강국 백제에 관하여 (만주원류고를 사랑하는 모임) |작성자 봉오선생
5. 맺는말
古朝鮮時代부터 朝鮮末期까지 이두(관리들이 쓰던 글귀)문을 전문서적을 통하여 소개하며 필자는 많은 학습을 하게 됐다. 訓民正音 반포 당시의 글자 모양을 문자 표에서 옛 한글 , , 등의 글자를 찾는 일도 즐거움의 하나였다. 고조선시대의 소량의 자료가 아쉽긴 했지만 조선시대에는 많은 자료가 있었다. 이두는 1990년 평양시 정백동 364호분에서 발견된 낙랑군 호구 장부에 쓰였으며, 이를 담당한 많은 관료들은 자연스럽게 漢字를 습득하였고, 함께 발견된‘論語(죽간, 선진∙안연편 702자)’가 이를 증명한다. 한자를 빌러 우리말을 표현한 이두(吏讀)역시 오랜 기간 동안 漢字文化에 접촉하면서 생성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전문가의 연구서를 통해 교양인으로서 ‘관리들이 쓴 글귀’를 이렇게나마 정리한 것을 위로로 삼는다.
참고문헌: 吏讀硏究 南豊鉉(태학사 2008년 12.20.)
朝鮮初期 古文書 吏讀文 譯註(서울대학교 출판부 2006. 4.30.)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이덕일, 김병기 공저(역사의 아침 2006.5.30.
군현제로 본 한사군: 김병준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掌議 金鍾國
1. 들어가며
세종대왕이 창제하여 훈민정음을 반포되기 전 우리의 선조들은 문서를 어떻게 작성하였는지를 알기위해 이두에 관한 서적을 통해 시대별로 정리해 보았다. 훈민정음이 반포된 후에도 吏讀는 계속 사용되었음을 여러 문헌에서 찾을 수 있었다. 이두를 알고 싶어 南豊鉉의 ‘吏讀硏究’과 朴盛鍾의 ‘조선시대 고문서 吏讀文’ 역주를 참고하여 고조선 시대부터 조선조까지 나와 있는 吏讀文을 단편적으로나마 정리하여 이글을 쓴 것이다. ‘吏讀’ 를 나름대로 풀어써 ‘관리들이 쓰던 글귀’로 개칭하여 제목으로 삼았다. 이두를 ‘이두연구’에서는 다음과 같이 정의 하였다.
2. 吏讀, 鄕札, 口訣의 槪念과 表記法
한자를 빌어 우리말을 기록하던 표기법을 借字表記法이라 한다. 이 자료는 三國時代부터 朝鮮朝 말까지의 것이 전하고 있다. 이와 같이 오랫동안 사용되어 오면서 표기법상 여러 변천상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 사용범위를 중심으로 이를 분류하면, 吏讀, 鄕札, 口訣, 固有名詞表記(語彙表記)로 나뉜다.
이두란 말에는 廣義와 俠義 두 개념이 있다.
* 광의의 이두: 俠義의 吏讀 + 鄕札+ 口訣 + 固有名詞 表記
* 협의의 이두: 吏讀文에 쓰인 우리말
『大明律直解』에서 薛聰이 지은 方言文字를 吏道(吏讀)라고 한다‘고 한 것이 이를 말하는 것인데, 李承休의『帝王韻紀』에서 ‘설총이 이두를 지었다.’훈민정음의 정인지 서문에서 ‘薛聰이 吏讀를 처음 만들었다.’고 한 것도 이두를 廣義의 槪念으로 사용한 것이다. 『三國史記』에는 ‘설총이 우리말로 九經을 읽었다’고 하였고, 『三國遺事』에서도 ‘薛聰이 우리말로 중국과 우리의 민간에서 사용하는 物名들을 이해할 수 있게 하였고, 六經文學을 訓解하였다’고 하였다. 이는 설총이 그의 학문을 借字표기로 기록함으로써 그 발달에 공헌하였던 것을 말한 것으로 이해되는데 후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설총이 이두를 지었다고 한 것은 이두와 차자표기를 같은 것으로 본데서 나온 것으로 본다.
우리 선인들이 文字生活을 漢文과 國語 문장으로 兩分하면 순수 국어 문장표기를 지향하는 것이 鄕札이고, 이보다는 한문적인 성격을 지향하거나 그에 依支하려는 경향을 띠는 것이 吏讀라 할 수 있다. 吏讀는 三國時代부터 근대까지 사용되었지만, 鄕札은 統一新羅時代에 完成되어 사용되다가 한글 創製 後는 현저히 쇠퇴하였다. 口訣은 한문 원전이 있고 여기에 吐를 단다는 특징이 있어 잘 구별된다.
鄕札이란 명칭은 『均如傳』에 오직 한 번밖에 사용되지 않은 것이다. 崔行貴가 균여의「普賢十願歌」한역하기 위하여 평하면서 「普賢十願歌」와 같은 우리말의 문장을 鄕札이라 한 것이 그것이다.
鄕札을 국어사전에서는 ‘신라 때, 한자의 음과 훈을 빌러 우리말을 表音式으로적던 표기법. 특히 鄕歌의 표기에 쓴 것을 이름’이라 했다. 鄕歌는 ‘신라 중엽에서 고려 초엽에 걸쳐 민간에 널리 퍼졌던 우리 고유의 시가로 『三國遺事』에 14수, 『均如傳』에11수, 高麗中期의 예종 때 「悼二將歌」를 더해 모두 26수가 鄕札로 적혀 내려옴’이라고 정의 했다.
3. 假借表記法의 文字體系
文字體系의 원리는 크게 두 가지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진 것이다.
1) 한문의 학습방법에서 얻어진 원리
한문을 새기는 방법이 체계화되면 한자에 제한된 범위에서의 훈을 부여하게 된다. ‘天’에 대하여 ‘하’, ‘地’에 대하여 ‘ㅎ’와 같은 것이 그것이다. 그리하여 漢字를 音으로 읽는 방법과 訓으로 읽는 방법이 성립되어 이 음과 훈이 借字表記法의 문자 체계를 이루는 原理가 된다.
2) 우리말을 표기하기 위해 한자를 이용하는 과정에서 얻어진 원리
우리말을 표기하기 위하여 이용하는 방법은 다시 표의문자와 표음문자로 나뉜다. 전자를‘讀 ’의 원리, 후자를‘假’의 원리라 한다.
漢字는 音과 訓으로 나누고 音을 다시 音讀字와 音假字로 나눈다. 또 訓을 訓讀字와 訓假字로 나눈다.
* 音讀字: 한자를 음으로 읽으면서 그 表意性을 살려서 이용한 借字
* 音假字: 한자를 음으로 읽되 그 表意性을 버리고 表音性만 이용한 借字
* 訓讀字: 한자를 훈으로 읽으면서 그 表意性을 살려서 이용하는 借字
* 訓假字: 한자를 훈으로 읽되 그 表意性을 버리고 表音性만 이용하는 借字
이 가운데 音讀字와 訓讀字를 묶어서 讀字(表意字)라 하고, 音假字와 訓假字를 묶어 假字(表意字)라고 하는 것이 편리할 때도 있다.
* 音讀字는 漢文에서 漢字의 用法과 같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말의 표기에 사용된 것이라고 보면 이는 우리말에 들어온 漢語借用語의 표기다. 한글과 漢字를 혼용하는 現代國語의 글에서 한자어를 표기하는 한자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쉽다. 이 한자어는 漢語에서 사용한 것도 있지만, 국어 안에서 조어된 것도 있음을 고금이 같다. 우리말에 사용되는 한자어는 한문의 용어 그대로가 아닌 제한된 범위에서의 借用이므로 音讀字의 수가 한문에서 사용되는 한자의 수보다 적다고 하겠다.
* 訓讀字는 한문의 단어에 해당하는 한자에 국어의 훈(새김)이 대응하는 범위에서 사용되는 借字이다. 두 언어 간의 대응은 일상 언어에서는 쉽게 이루어지지만 중국어의 특수한 개념을 나타내는 한자는 국어에는 대응하는 훈(새김)이 없음으로 이러한 한자는 訓讀字로 쓰일 수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훈독자의 數는 音讀字의 수보다 제한된다고 하겠다. 訓讀字 가운데는 한 글자가 여러 훈으로 읽힐 수도 있고, 여러 글자가 같은 훈으로 읽히는 것도 있다.
* 音假字란 한자의 形成原理인 六書 가운데 假借의 원리를 빌려온 것이라 할 수 있다. 後期中世國語 시대의 구결에 쓰인 音假字는 순독구결을 중심으로 하여 조사된 것이지만, 통일신라시대나 고려시대의 吏讀나 鄕札은 석독구결을 배경으로 한 것으로 믿어지므로 訓假字의 수가 이보다 증가할 것이다. 『鄕藥救急方』의 鄕名表記에 차용된 音假字 수는 단어의 수가 적음에도 불구하고 111자가 사용되었다. 音假字는 단음절어를 표기하는 한자의 특성으로 인하여 원칙적으로 音節文字이다. 다만 우리밀의 음절말자음을 표기하기 위하여 사용되는 것에 只(ㄱ), 隱(ㄴ), 乙(ㄹ), 音(ㅁ) 叱(ㅅ)이 있어, 이것이 음절문자성을 벗어나는 것이다. 音假字자에는 같은 음을 표기하기 위하여 서로 다른 글자가 사용되는 예가 흔히 있다. ‘鄕藥救急方’에 보면 古 高 苦가 ‘고’음의 표기에 包 苞 甫 鮑가 ‘보’음의 표기에 쓰였다. *六書: 象形文字, 會意文字, 指事文字, 形聲文字, 會意文字, 假借文字
*訓假字는 訓讀字에서 발달한 것이다. ‘以’자는 한문의 介詞로서 국어의 조격조사 ‘~ 로’를 표기하는데 주로 쓰인다. 이는 한문의 원뜻에 따라 쓰인 것이므로 훈독자이다. 鄕藥救急方에선‘加’音假字로선 ‘가’, 訓假字로선 ‘더’음의 표기에 쓰인다. ‘耳’도 音假字로선 ‘’훈가자로선 ‘귀’로 읽히고 있다. 音讀字, 音假字, 訓讀字, 訓假字에 대한 정의를 알아보았으니, 각 시대별 ‘나리들이 쓰던 글귀’의 자료를 보자.
4.시대별 吏讀의 자료
1) 고조선 시대
檀: 박달 박, 호수 달 檀君: 박달의 부족장
王儉: 임검(임금)
阿斯達: 궁전이 있는 산(阿斯: 궁전 達: 산)
공후인(箜篌引): 중국 晉나라 해제 때 崔豹가 편찬한 古今注에 전해옴
뱃사공 곽리자고(霍里子高)의 아내 여옥이 작곡
“公無渡河: 님아 강을 건너지 마오.
公竟渡河: 님은 기어이 강을 건너네.
墮河面死: 물에 빠져 돌아가시니
當奈公何: 아아, 님아 이를 어이하리.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이덕일, 김병기 공저 179~180쪽>
뱃사공 곽리자고(霍里子高)가 어느 날 새벽 나룻배를 저어 강을 건너는데 백발노인이 미치광이처럼 머리를 풀어헤치고 한 손에는 술병을 들고 강물에 뛰어들어 물살을 헤치며 강을 건너려하였다. 이때 그의 아내인 노파가 그를 쫓아 강물에 뛰어들며 한사코 건너지 말라고 만류하였으나 노인의 그냥 강 가운데로 들어가 그만 물에 빠져죽고 말았다. 눈앞에서 남편을 강물에 떠내려 보낸 노파는 기가 막혀 통곡을 하며, 손에 들었던 공후라는 악기를 타며 슬픈 노래를 부른 후 남편의 뒤를 따라 강물에 몸을 던졌다.
이 광경을 본 격리자고는 집에 돌아와서 자기 아내 麗玉에게 그 광경을 이야기 하였다. 여옥은 노인부부의 죽음을 슬퍼하여 공후를 타며 그 슬픔을 노래하였다. 이 노래를 필자는 귀하게 얻은 고조선 시대의 문장으로 고조선의 이두문이라고 단정할 수 없겠지만 귀한 자료여서 함께 실었다. 위의 詩歌는 중국 晉나라 惠帝(재위BC650~637) 때의 사람 崔豹가 편찬한 고금주에 전해온 것이다.
*고조선은 일찍부터 중국과 활발한 문화교류를 가졌다. 『후한서』「열전」등의 기록을 보면 중국의 『詩經』,『書經』,『春秋』등이 古朝鮮에 유입된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고조선 지식인들이 漢文을 이해 할 수 있었음을 뜻한다. 북한 학자들은 이에 근거하여 고조선 사람들이 기원전 8세기 이전에 한자를 사용하기 시작해 널리 보급됐다고 주장한다. 근래 경남의령군 다호리의 기원전 2세기 무덤에서 청동기․ 철제도구 등과 함께 붓 5자루가 출토되었는데, 이는 중국 한나라 때 사용한 것과 동일한 것이다.
2). 고구려 시대
고구려 6대 태조왕과 7대 차대왕 때의 제도에 나타난 이두
(1) 제상 세 사람
‘신가’ -太大臣이라는 뜻, 이두자로: 對盧, 한문으로: 國相, 大輔
‘팔치‘ -팔꿈치(肱)라는 뜻 이두자로: 評者. 한문으로: 左輔
‘발치’ -정강이(股)라는 뜻 이두자로: 沛者. 한문으로 右輔
참고 문헌: 三韓古記, 海東古記, 高句麗古記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무질서하게 표현함
(2) 全國을 5부로 나눈 이름과 관리자
동부 → 순라 吏讀字 →順那 :
(‘라살’이라는 관리가 관할, 이두로
서부 → 불라 “ → 灌那(관라) ‘누살耨薩’한문으로 ‘道使)’
남부 → 열라 “ → 椽那 (연라)
북부 → 줄라 “ → 絶那 (절라)
중부 → 가우라 “ → 桂安那(계아날) ‘신가’가 관할
그 외 도부(圖簿)와 사령을 맡아보는‘일치’, 吏讀字로 ‘乙支’혹은
‘優台’라하고 한문으로 ‘主簿’대왕의 시종을‘살치’이두자로 ‘使者’
(3) 고구려 환도성의 위치변화
제1 丸道城: 太祖王의 王子 遂成(후에 차대왕)이 쌓음: 지금의 開平부근
제2 환도성: 동천왕이 쌓음 지금의 환인부근
제3 환도성: 고국원왕 집안현 紅石項子山
⦿‘곰나루’를 訓으로 쓴 이두자 → 熊津 :백제
⦿‘곰나루’를 音으로 쓴 이두자 → 古莫那羅 (廣開土大王 碑文) :고구려
金異斯夫는 一名 ‘苔宗’이라 하는데, 異斯가 音으로 ‘苔’를, 뜻으로,夫는 七書諺解에 士大夫를 ‘사태우’로 音解하였으니 그 음이 ‘우’이고’, 宗은은 뜻으로 ‘마루’이다. 그러니 이두자 읽는 법으로는 이사부나 苔宗은 ‘잇우’이고, 居柒은 音으로, ‘荒’은 뜻으로‘거칠’을 쓴 것이니, 居柒夫와 黃宗은 ‘거칠우’로 읽는다.
⦿ 윷판이 곧 다섯 가의 出戰圖임
`刀 介 乞 兪 毛 → 이두문자
또 개 걸 윷 모
猪 犬 中 牛 馬
돗가 개가 신가 소가 말가(신가가 中軍大元帥가 되고
前軍, 後軍, 左軍, 右軍의 네 元帥가 되어 출전함)
왕검이 아들 夫婁를 보내어 金簡玉牒의 글을 가르쳐 주었는데,이 글자가 곧 漢字였을 것이니, 조선이 한자를 익힌 것이 이미 오래 되었음을 볼 것이다.
그 뒤 漢字의 음 혹은 뜻을 빌려 이두문을 만들었는데, 이두문은 조선 고대의 국문이라 할 수 있다. 고대에는‘국서’, 향서, 혹은 ‘가명’ 이라 일컫고, 고려조 이후에 비로소 ‘吏讀文’이라 일컬었으나, 이제 통속의 편이를 위하여 고대 것까지 吏讀文이라 하거니와, 흔히 이두문을 신라 설총이 지은 것이라고 하지만 설총 이전의 진흥왕 순수비에도 가끔 이두문으로 지은 시가가 있으니, 설총과는 거리가 멀다. ‘임금’을 왕검이라 번역하여 王은 그 글자의 뜻에서 소리의 절반을 취하여 ‘임’으로 읽고 ‘儉’은 그 글자의 음에서 소리의 전부를 취하여 ‘금’으로 읽으며, ‘펴라’를 ‘樂浪’이라 번역하여 ‘樂’은 글자의 뜻에서 소리의 처음 절반을 취하여‘펴’로 읽고, ‘浪’은 글자의 음에서 소리의 처음 절반을 취하여 ‘라’로 읽는 것이 곧 이두문의 시초이니, 적어도 이제부터 3천년전~기원전 10세기경에 만들어진 것 같다.
(2)시작
(4)廣開土大王碑文
王臨津言曰 我是皇天之子 母河伯女郞 鄒牟王 爲我連葭浮龜
因遺黃龍 來下迎王 王於忽本東岡 黃龍負昇天 이하 생략
왕이 물가에 임해서 말하기를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요 어머니는 하백의 딸이요 추모왕이다. 나를 위하여 葭(갈대 가)를 連하고 거북을 띄우라.
곧 왕을 보내서 내려와 왕을 맞게 하니 왕을 동쪽 언덕에서 황룡이 업고 하늘로 올라갔다.
*광개토대왕비는 당시의 최고 문장가가 썼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비문이 한문에서 보면 어순이나 문법 및 표현이 아주 어색하다. 이러한 점에서 이 비문은 高句麗式 漢文이고 이 한문에는 우리말의 요소인 吏讀的 표현을 섞어 쓰는 당시의 문장 의식이 나타난 것이라 하겠다.(‘이두연구’의 저자 남풍현의 評)
(5)고구려 장수왕 기축년(449년)평양성도 1호의 글
己丑年 五月二十一日 自此以下向東十二里 物省(苟)小兄 排百頭⼞節矣
기축년 5월21일 여기서부터(自此) 아래로(以下) 동쪽을 향하여(向東) 십이
리는(十二里) 물성(物省)출신의 소형(小兄)이고 배백두(排百頭)의 ⼞가 감독하였다.(지었다.) (吏讀硏究의 저자 남풍현의 번역)
* 物省:고구려 시대 관청. 小兄:고구려 시대 12등급의 하나.
* 節矣: 지이-지위- 짓다.
3) 백제의 이두
武寧王陵에서 發見된 팔지의 銘文
‘更子年二月 多利作 大夫人□ 二百主耳’
AD 520년 2월 다리(人名)가 만들었다. 대부인(왕비)의 장신구 (팔찌)는 166g이다. ‘主’는 고대의 무게의 단위로 수(銖는 수는 1냥의 1/24)자를 차용 해 쓰고 있다. 230주=166g
① 이 문장의 어순이 우리말 어순에 따르고 있다.
② 우리가 쓰고 있던 말을 문자로 표현하기 위해 한자를 빌려 썼다.
③ 문장의 맨 끝에 ‘耳’문장 종결사 ~ 이다.
④ □ 대부인 다음 글자는 모양 상 ‘永’으로 보이며 장신구로 연결하여 해석했다. (1971년 발굴한 무녕왕릉에서 발견한 팔찌의 명문)
* 한국기술교육대학교 정재영 국문학과교수의 논문에서 인용
4) 新羅의 吏讀
迎日冷水里新羅碑銘
斯羅 喙 斯夫智王 乃智王 此二王敎 用珍而麻村節居利 爲證爾
令其得財敎耳 癸未年 九月二十五日 斯喙 至都盧 葛文王 斯德智 阿干支 子宿智 居伐干支 爾夫智 壹干支 只心智 干支 本彼部 頭腹智 干支 斯波暮斯智
干支 此七王等共論敎 이하 생략 喙:부리 훼
사라(현재의 경주) 훼부의 사부지왕과 내지왕, 이 두 왕이 명령하였다.
진이마촌 절거리의 권익(주장)을 보증한 것이었다. 그로 하여금 재산을 얻게 한다는 판결(명령)이었다. 계미년 9월25일 사훼부의 지도로 갈문왕 자숙지덕지 훼부의 이지부 일간지 지심지 거벌간지, 본피부의 두복지 간지 사피부의 모사지 이 일곱 왕등(대등/간)이 함께 의론하여 판결(명령)하였다.
* 迎日冷水里新羅碑는 蔚珍鳳坪新羅碑, 丹陽新羅赤城碑와 같은 성질의 비석이다. 세 비가 모두 중앙의 화백회의에서 해당 지역에서 일어난 문제들을 논의하여 판결한 사항을 새기어 세운 비석들이다. 따라서 이 비문들은 당시
행정문서의 문체를 보여 주는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다. 鳳坪碑와 赤城碑는 신라의 변방에 세워진 것이지만, 冷水里碑는 경주에서 가까운 지역에 세워진 것이므로 이로 미루어 보면 이러한 비는 삼국시대의 신라전역에 걸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앞으로도 이 계통의 비가 발견될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1988년 蔚珍鳳坪新羅碑와 明活山城作城碑의 발견에 이어 1989년에 迎日冷水里新羅碑가 발견되었다. 이 비의 연대는 비형태의 古拙함과 비문에 쓰인 煞牛, 世中의 용어가 鳳坪碑와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503년으로 추정하는 것이 무리가 없다. 煞죽일 살, 매우 쇄
5) 高麗時代의 吏讀
醴泉鳴鳳寺慈寂禪師凌雲塔碑 陰銘
(이 첩문은 고려 태조22년(939)에 朝廷(都評省)에서 명봉사에 내린 것으로 현재 전하는 고려시대의 행정문서로 가장 이른 것임)
(1)都評省帖 洪俊和尙 衆徒 右法師
도평성에서 홍준화상 중도의 우법사에게 첩문을 보내어 알린다.
(2)師矣 啓以 僧矣段 赤牙縣 鷲山中 新處所 元聞爲 成造爲內臥乎亦在之白賜
師의 啓에 의하면 僧의 경우에는 赤牙縣의 취산에 신처소를 처음(조정에) 奏聞하여 (寺刹을)조성하고 있는 바이라고 보고하였음.
* 師矣:사의, 啓以: 계로, 僧矣段 :승의단, 赤牙縣:명봉사가 속한 당시의 懸名, 鷲山中:취산에, 元聞爲:처음~ 야, 成造爲內臥乎亦在之:‘성조 누온여겨다’,白賜‘’으로 읽힌다. 白:는 보고하다.賜:로 존대하여 으로 읽음 *鷲독수리 취
(3)懸以 入京爲 使臥 金達舍 進置 右寺 原 問內乎矣 大山是在以 別地主 無亦 在彌 衆矣 白賜臥乎 貌如 加知谷 寺谷中 入 成造爲賜臥亦之 白臥乎 味 及白
현으로부터 입경하도록 부림을 받은 김달사가(도평성에)출두하여 우사의 터에 대하여 묻되 큰 산이므로 따로 지주가 없으며 중(스님들)의 보고하신 모양과 같이 가지곡의 사곡에 들어가 조성하시고 있는 바이라고 사뢰는 뜻을 직접 보고하였음.
* 懸以:‘현으로’, 入京爲:‘입경삼’입경하도록, 使臥: 부리눈, 金達舍:이 시대에는 姓이 사용되지 않고 있어 金達을 이름으로 보고 舍는 舍知의 축약, 관등명으로 생각됨. 進置: '낫두',‘출두하여’右寺 原:절을 지을 언덕이나 빈터. 問內乎矣:물오 問/묻, 乎矣/오, 大山是在以: 大山이견으로, 대산이므로. 別地主 無亦:달리 지주가 없이. 在彌:‘겨며’로 읽히고 ‘있으며’衆矣: 중들의. 白賜臥乎: ‘누온’으로 읽힘, 賜/는 스님의 존대말, 白/: 보고하다. 貌如: ‘즛다히’로 읽히고 訓讀字로 ‘모양’,~하는 모습
白臥乎 味: 온 맛으로 읽히고 ‘보고하옵는 취지’로 해석된다. 及白:‘및’으로 읽히고 ‘직접 보고함’으로 풀이된다.
(4)節中 敎旨 然丁 戶丁矣 地⼞ 知事者 國家大福田處爲 成造爲 使賜爲敎
이 때에 교지가 내렸으니 ‘그러하도다. 호정의 지를 지사자(스님)들이 국가의 대복전처로 삼아(이 복전처를) 조성하기 위하여(사람들을)보내도록 하라’고 명하시었음(가르치시었음)
*節中:‘디위기’로 읽히고 ‘이 때에’뜻이다. 敎旨:이는 왕의 명령(가르 침)이어서 줄을 바꾸고 두 칸을 올려 썼다. 然丁: ‘그러한가’‘그렇구나‘로 해석하면 된다. 知事者: 일을 관장하는 자. 國家大福田處爲: 국가적인 큰 사찰로 삼아. 成造爲:성조하기 위하여. 使賜爲:'브리' 敎: 명하시다.
(5) 天福 四季 歲次 己亥 八月一日 省史 目光
천복은 후진 고조의 연호로 그 4년 기해는 태조22년(939)이다. 省史는 도평성의 문서를 다루는 직책 목광은 省史 직을 맡은 사람의 이름
(6) 五年 辛丑 八月 二十一日 ⼞ 國家以 山院名 幷 十四 州郡縣 契乙 用成造 令賜之
5년(신축년) 8월21일 국가로부터 산과 원의 이름을 내림과 아울러 14주, 군, 현의 계로써 조성시키시었다.
* 十四 州郡縣: 주, 군, 현 모두 합하여 14고을이란 뜻으로 상주 명봉산 경청선원이란 말이 있어 상주에 속했던 고을들이다. 成造 令賜之:‘성조시키다’로 읽힌 것으로 ‘조성시키다’로 풀이된다.
(7) 節 成造使 正朝 仁謙 停勵古寶
이 때 성조사 정조 인겸 정려고보
* 節/디위 ‘이 때’,‘이 임시하여’의 뜻. 成造使: 절을 조성하기 위해 왕명을 받은 사람의 직책명, 正朝: 관등명, 仁謙: 人名 停勵古寶: 분명치 않으나 관인이나 어보를 나타내는 표시라 생각됨.
* 고려시대의 이두문은 현재 60여종이 발굴되어 있다. 이들 가운데 이두문을 해독하여 알기 쉽게 풀이한 것은 몇 되지 않는다.
5) 조선시대의 이두문
(1). 李藝功牌
연대:1421년(세종3.永樂19 )
공을 세운 이예에게 왕명에 따라 발급한 문서로서, 당사자 및 자손들의 役을 면해주는 내용을 담고 있으므로 사패(賜牌)문서에 속한다. 이 문서는 종전에‘李藝鄕吏功牌’라 칭했으나, 이예가 이 문서를 받을 당시에는 이미 관직을 제수 받은 상태였으며, 이 문서에서‘功牌’가 단어로 굳혀져 사용된 까닭에‘이예공패’로 칭하기로 한다.
이예(1373~1445)의 호는 鶴坡이고, 시호는 忠肅이다. 그는 1401년(태종1)에서 1418년(태종18)사이에 13차례 일본과 琉球(지금의 류쿠)에 끌려간 사람들을 데려오고, 對馬島 征伐 때 功을 세웠다. 그는 원래 울산군의 鄕吏 출신이었으나, 관직과 공패를 받는 등의 활동을 통해 울산 이씨의 계파인 鶴城李氏의 中始祖가 되었다. 鶴城李氏族譜에 등재된 문서임.
※이예는 1416년 유구국(琉球國,오키나와)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포로 44명을 찾아왔고, 海東野言에 실린 세종원년 對馬島정벌시에 中軍兵馬副帥使가 되어 李從茂의 대마도 정벌을 도왔던 인물.
①判讀 및 교감(校勘 여러 책을 비교하여 차이 나는 것을 바로잡음)
01 永樂十九年七月十四日功牌
02 右功牌永樂十九年六月十七日兵曹判書臣
03 趙末生敬奉 宣旨奉列大夫禮賓少尹行左
04 軍司直 李藝段去丙子年分蔚山郡事李殷
희
05 亦倭賊亦中被捉時陪記官以官中銀物賚持爲
이 여 로
06 萬戶亦中贈給請還爲乎其志可賞是乎等以用
여 온 이온로
07 良己身免役賞職爲有如乎辛巳年以戊戌年
아 잇다온 로
08 至日本國琉球國良中十三度乙受 命往來
니르리 아
09 交通被擄本國人六百餘名推刷率來爲齊己
져
10 亥年對馬島征討時中軍兵副帥以先鋒指
로
11 路凡事造心使內齊爲等如前後十四度乙不
브리져트러
12 顧死生海外往來爲乎功勞可賞是去有等以
온 이거이신로
13 其矣子孫至亦免役令是良如敎右良如敎事
저의 니르리 이아다이샴니믜아다이샨일
14 是白齊永樂十九年六月二十四日知申事臣
이져
15 金益精敬奉 王旨宣旨內乙用良功牌成給
안아
16 爲只爲下吏曺爲良如敎右良如敎事是去有
기 아다이샴니믜아다이샨일이거이
17 良亦向前 李藝乙良子孫至亦免役向事給
샤금 안전 으란 나르리 안일
18 功牌者 右 敎賜功牌騰傳
② 현대어 번역 및 주석
01 영락 19년 7월 14일(1421년 세종 3) 공패
02 이 공패는 영락19년 6월 17일 병조판서 신
03 조미생(조선 초기 문신)이 삼가 받든 선지(上王인 太宗의 교지)에 이르 되 “봉열대부 예빈소윤 행좌
04 군사직(1396년 태조5년) 이예는 지난 병자년에 울산군사 이은이
05 왜적에게 붙잡혔을 때 배종하였던 기관(吏, 戶, 禮, 兵, 刑, 工의 六房 의 鄕吏層으로 지방 행정의 실무자)으로서 관가의 은물 등을 가지고 위
06 만호(지방의 만호부에 두었던 무관 벼슬)에게 주면서 돌려주기를 정한 그 뜻이 상 줄 만하기에 이로써
07 그 몸은 면역시키고 관직을 상으로 주었던바, 신사년 ~ 무술년에 이르기 까지 (1401년 태종1 ~ 141418년 태종18)
08 일본국과 琉球國에 13번을 왕명을 받들어 왕래하고
09 교통하고 사로잡혔던 본국인 600여 명을 추쇄하여 돌아왔다. 기헤년에 (1419년 태종18) 돌아왔다.
10 대마도를 정벌할 때 중군병마부수로서 선봉에 서 길을 이끌며
11 모든 일에 마음을 썼다.
12 생사를 돌보지 않고ㅡ해외에 왕래한 공로가 분명히 상 줄 만 하므로
13 그의 자손에 이르기까지 면역시켜라.” 고 하심❴으로써❵. 이와 같이 교시하신 일
14 이다. 영락 19년(1421년 세종3) 6월 24일 지신사 신
15 김익정(조선 초기 문신)이 삼가 받든 왕지에 이르되, “선지 내용으로써 공패를 만들어
16 주도록 이조에 내리라.”고 하심으로써 이와 같이 교시하신 일이 분명히
17 있기에 앞의 이예는 자손까지 면역을 처리 할 것이며 ❴이에❵
18 공패를 준다. ‘이상은 임금께서 사급하신 공패로서 배껴 전함.’
@3부시작
(2)이징석사패(李澄石賜牌)
연대: 1433년(세종15,宣德8) 문화제 지정 보물 제1001호. 경남 양산군 하북면 양산이씨 종손가에서 소장한 문서 중의 하나. 변방을 침입하여 군민을 노략 살해하던 婆猪江의 야인들을 참획한 공로로 資憲大夫知中樞院事 이징석에게 奴婢 六口를 내린 문서이다.
수취자인 이 징석은 1373년(공민왕22)生으로서 호는 鷲峰이고, 양상군에 봉군되었으며 시호는 莊剛이다. 그는1458년(세조4)4월에 또 한 차례 佐翼功臣으로서 노비를 사급받는 내용의 사패를 받는다. 그런데 이 사패문서의 전문은 순한문으로 되어 있어, 이두문으로 작성된 본문서와 대조를 이룬다.
이두자 중에는 우선‘爲在(제 3행)이 야인을 수식하고 있는 것이 눈에 뛴다. ‘爲臥乎事是等’(제8행)에서의 ‘時等’, 그리고 ‘爲良如交’(제9행)의 ‘敎 ’로써 본문을 끝맺는 용법 등이 나타난다. 7
①判讀 및 校勘
01 賜
02 資憲大夫知中樞院事 李 澄石
03 卿矣段邊境入侵軍民擄掠殺害爲在婆猪江野人等
의단 견
04 乙都節制使崔閏德指揮從同心協力有能斬獲爲乎
온
05 其功可尙是乎等用良都官婢初生年三十八龍仁接同同婢
이온 아
06 仍邑莊年十七梁山郡婢於衣加年二十六昌原府婢菊花
07 年三十二安城接典農寺奴小斤吾未年十八利川接同寺婢
08 佛明年二十一幷六口乙賜給爲臥乎事是等後所生幷以
을 누온 일이든 아오로
09 子孫傳持永永使用爲良如數
아다 이샴
10 宣德八年六月二十七日敬奉
11 敎旨
12 知申事通政大夫經筵參贊官兼尙瑞尹修文殿直提學知製 敎充春秋館修撰官兼 判奉常寺事知吏曹內侍茶房事臣安 ⌜着名⌟
② 현대어 번역 및 주석
01 자헌대부 지중추원사 이 징석에게
02 사급하시노니
03“경의 경우에는 변경에 침입하여 군민을 노략 살해하여 있던 파저강의 야인들
04 을 도절제사 최윤덕의 지휘에 따라 마음을 합하여 협력하고 참획을 잘 한
05 그 공이 숭상할 만하기에 이로써 도관의 계집종인 초생(나이 38),용인에 거주하는 동동의 계집종
06 내읍장(나이 17), 양산군의 계집종인 어의가(나이 26), 창원부의 계집종 국화
07 (나이 30), 안성에 거주하는 전농사의 사내종 소근오미(나이 18), 이천 에 거주하는 동사의 계집종
08 불명(나이 21) 등 모두 6口를 사급하는 일이니, 後所生과 아울러
09 자손에게 전하여 지녀 영원히 사용하여라.”고 하심〔이다〕.
10 선덕8년 6월27일(1433년 세종 15)에 삼가
11 교지를 받음
12 지신사 통정대부 경연참찬관 겸상서윤 수문전직제학 지제교 충춘추관수 찬관 겸판봉상사사 지이조내시다방사 신 안 ⌜착명⌟
(3) 金宗直母朴氏簡札 연대:1468년, 所在: 慶北 高嶺郡 善山金氏 門中
①해제
金宗直의 母 朴氏가 김종직에게 보낸 간찰이다. 경상북도 고령의 선산 金氏門中소장이며, <嶺南古文書集成(1)>142쪽에 영인 수록되어 있다.
士大夫의 簡札은 거의 대부분 한문으로 작성되어 있는데, 간혹 ‘捧上, 次知’ 등의 한국한자어 및 고문서 용어들이 사용되는 수가 있다. 그러나 이두의 문법 형태가 간찰 안에 사용되는 경우는 발견하기 힘들다. 여기에 소개하는 이 간찰은 비록 사대부기 직접 작성한 것이 아니라 사대부 집안의 여자들이 작성한 것이나, 이두의 문법 형태 표기가 나타난다는 점에서 극히 예외적이고 주목되는 자료다. 문장의 종류는 다른 簡札類와 마찬가지로 순한문을 가조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두문에 흔히 쓰이는 한자어 및 이두토가 간헐적으로 나타난다. 이두로서는 ‘爲在果(제 5행)과 爲如乎(제7행) 등이 사용되었다.
② 현대어 번역 및 주석
01 校理에게 부치는 平書 『圖書』삼가 封함
02 요즘에 〔너의〕
03 安否를 살피지 못해 걱정하던 때에 記官인 仲倫이이가 가져온 글월 의 내용으로 써 이에 〔너의〕
04 安否를 알게 되니 매우 기쁘다. 이 곳은 〔너의〕
05 念慮 그간 걱정이 없었는데, 이 달 11일 종이로 만든 신 네 컬레, 가을 用 철력⁸과
06 바지, 명주 두 필을 도둑맞았다. 이런 까닭에 바지와 철력은 준비하지 못했다.
07 月村에서 23일에 新官을 맞이한 逢從馬로 부쳐 보낸다하니 찾아서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전에 없이.
08 편하고 즐겁게 벼슬살이하기를 기원하며 이만 줄인다.
09 戊子年(1468년) 10月26日 어미 朴氏 『圖書』
10〔追伸〕千同氏의 孫子인 鳳山이 무명을 이미 본래대로 돌려주었다.
③ 판독 및 교감
01 校理寄 平書 『印』 謹封
02 此間未審
03 安否分別此記官仲倫持來書內乃知
04 安否遙喜 〃 此處因
05 念時無恙爲在果今月十一日鍾伊鞋四足甫天益
견과 보라 텰릭
06 波池綿紬二疋乙逢賊玆故波池天益未及准備月
바지 을 바지 텰릭
07 村卄三日新官迎逢從馬付送爲如乎推尋捧上爲可未前
다온 받자
08 如祝安樂從仕只此
09 무자십월26일모박 氏 「圖署」
10 千同(人名)氏孫鳳山木綿已還本
(4) 옛날 우리나라에서는 사방 경계에 대한 표시의 뜻으로 사표(四標)라는 말이 사용되었는데 사지(四至)와 같은 말이다. 예를 들어 옛날 토지매매 문건을 보면 매매 목적물을 특정하기 위해 사표라는 말이 꼭 들어갔다.
예를 들어 보면 밑줄 친 부분은 이두로 써 있다.
"光緖十六年 庚辰十一月 日 處明文:右明文事段移置次,自己買得田在威化面,
下端員奈字行, 東二十七田, 一日耕。四標段, 東車益煥田, 南賣州田, 西車益煥田, 北賣主垈田, 四標分明,遂如價折則, 錢文一百二十兩,準計俸上是遣,
本文記段, 都文記中故周爻背爲去乎 。日後彼此雜談隅是去等,持此文記, 貌如告官卞政事。
自筆田一行放賣主 申雲祥 (압)
間人 金守得 (압) "
이를 오늘날의 말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광서 16년 경진 12월 일 ×× 아무개한테 증서
상기 증서 하는 일로 말하면 옮기어 살 요량으로 자신이 산 밭, 위화면(威化面) 하단 둘레 내(奈)자 줄의 동쪽 27 밭 하루갈이이다. 사표(四標)로 말하면, 동쪽은 차익환(車益煥)의 밭, 남쪽은 판 임자(賣主)의 밭, 서쪽은 차익환(車益煥)의 밭, 북쪽은 산 임자(買主)의 터와 밭, 사표를 분명히 해서 값을 정하기는 돈 120량인바 따져서 받아들이고, 원 문서로 말하면 전체 문서 가운데 들기 때문에 꺽자를 쳐서 그 후문에 사유를 기록한다. 이 뒤에 피차 딴 소리하는 구석이 있거든 이 문서를 가지고 고대로 관청에 고소해서 핵변한 일.
자필 밭 한 줄을 판 임자 신 운상 수결
중개인 김수득 수결
*光緖(광서): 1875년~1908년으로 高宗16년에 해당
[출처] 중국 하광악(何光岳)의 《동이원류사(東夷源流史)》에서 말하는 해양 강국 백제에 관하여 (만주원류고를 사랑하는 모임) |작성자 봉오선생
5. 맺는말
古朝鮮時代부터 朝鮮末期까지 이두(관리들이 쓰던 글귀)문을 전문서적을 통하여 소개하며 필자는 많은 학습을 하게 됐다. 訓民正音 반포 당시의 글자 모양을 문자 표에서 옛 한글 , , 등의 글자를 찾는 일도 즐거움의 하나였다. 고조선시대의 소량의 자료가 아쉽긴 했지만 조선시대에는 많은 자료가 있었다. 이두는 1990년 평양시 정백동 364호분에서 발견된 낙랑군 호구 장부에 쓰였으며, 이를 담당한 많은 관료들은 자연스럽게 漢字를 습득하였고, 함께 발견된‘論語(죽간, 선진∙안연편 702자)’가 이를 증명한다. 한자를 빌러 우리말을 표현한 이두(吏讀)역시 오랜 기간 동안 漢字文化에 접촉하면서 생성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전문가의 연구서를 통해 교양인으로서 ‘관리들이 쓴 글귀’를 이렇게나마 정리한 것을 위로로 삼는다.
참고문헌: 吏讀硏究 南豊鉉(태학사 2008년 12.20.)
朝鮮初期 古文書 吏讀文 譯註(서울대학교 출판부 2006. 4.30.)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이덕일, 김병기 공저(역사의 아침 2006.5.30.
군현제로 본 한사군: 김병준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