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가를 찾아서
풍산에서 하회로 가는 길목에는 코스모스가 하늘거리고, 잘 익은 벼가 황금들판을 이루고 있었다. 청나라를 멀리 하겠다는 청음의 절의를 상징하는 청원루(淸遠樓)와 마을 입구에 있는 삼구정(三龜亭)은 넓은 풍산들을 바라보고 의젓이 자리 잡고 있었다. 소산마을은 본래 금산촌(金山村)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시미마’로 불린다. ‘쇠뫼’가 ‘시미’로 변형된 것이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청음 김상헌이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갈 때 지은 시조비와 삼당 김영 선생의 시조비가 반겨준다.
풍산에는 하회의 풍산류씨, 가일의 안동권씨, 오미의 풍산김씨, 소산의 안동김씨 등 반촌을 형성하고 누대 명인달사를 배출하면서 명가로서의 이름을 떨친 600여년 역사를 가진 명문가들이 많다. 그러나 소산마을은 그 어떤 마을보다 역사가 오래 되었으며, 김계권, 김계행, 삼당 김영, 청음 김상헌과 같은 명유를 배출한 유서 깊은 마을이다. 더구나 김상용과 김상헌 형제의 행적은 임진·병자 양란으로 인해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국가의 정체성을 재정립하고 당의 시대정신을 선도하여 왔으니 세도정치로 인한 금관자 서 말은 그만 두고라도 명가 중의 명가라고 할 수 있다.
안동김씨는 태사공 김선평(金宣平)을 시조로 하는 新안동김씨(後안동김씨)와 신라 경순왕의 손자인 김숙승을 시조로 하는 舊안동김씨(先안동김씨)가 있다. 이 두 가문은 안동의 대표적인 명문가로 같은 관향을 쓰고 있으나,시조도 다를 뿐만아니라 통혼도 하는 사이이다. 소산마을은 흔히 장동김씨로 널리 알려진 신안동김씨 마을이다.
신안동김씨 시조는 김선평(金宣平)은 신라말 고창(지금의 안동)성주를 지내다가 태조 왕건을 도와 병산전투에서 견훤군을 물리치고 태사(太師) 작위를 받은 인물로 안동권씨 시조 권태사(權幸), 안동장씨 시조 장태사(張吉)와 더불어 삼태사로 불린다. 안동김씨가 소산에 자리 잡은 것은 9세 김삼근(金三近) 대에 와서다. 김삼근은 지금의 풍산장터 부근 불정촌(佛頂村)에서 살다가 소산으로 옮겨와 소산 입향조가 되었다. 그러나 김삼근의 아들 김계권(金係權)이 한성판윤, 김계행(金係行)이 도승지, 대사간을 지내면서 중앙정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으며 서울 장의동에 터전을 마련하여 훗날 장동김씨 터전을 마련하였다. 김계권의 아들 오형제, 즉 학조대사와 영전(永銓), 영균(永勻), 영추(永錘), 영수(永銖)에 의해 신안동김씨는 문호가 크게 확장되었고, 장령공 영수(永銖)의 아들 김영(金瑛)과 김번(金璠)이 중종조에 나란히 문과에 합격하여 다시 중앙 정계로 진출하였으며, 김번(金璠)의 증손 선원 김상용과 청음 김상헌 형제가 나란히 정승에 올라 삼한벌족의 명성을 얻게 되었다. 대체로 김영의 후손들은 소산을 근거지로 오늘날까지 명문가를 이루고 살아가고 있으며, 김번의 후손은 서울 장동과 경기도 양주 석실을 근거로 하여 살아가고 있다고 하겠다.
김상용의 자는 경택(景擇), 호는 선원(仙源) 또는 풍계(楓溪)이며, 시호는문충(文忠)이다. 부친은 증 영의정 김극효(金克孝:1542-1618)이며 모친은 좌의정 정유길(鄭惟吉)의 따님이다. 67세인 1627년(인조5)에 예조판서에 임명되고, 2월 정묘호란으로 왕이 강화도로 피난하게 될 때, 유도대장의 직책을 맡았다. 종묘의 신주를 모시고 세자빈 강씨, 원손, 봉림대군 등이 강화도로 피난을 가고 미쳐 따라 가지 못한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였다. 적의 선봉이 성밖에 도착하여 남문에 오르고 점차 적병이 사방을 둘러싸자 사람들이 선원에게 피할 것을 권했으나 ‘해지는 강가에서, 나는 힘이 없으니 어쩔 수가 없구나(日暮江頭,臣力無何)’라는 유필을 남기고 화약상자에 걸터앉아 화약에 불을 질러 분사(焚死)하고 말았다.
淸陰 金尙憲은 바른 도학과 높은 절의로 우리나라에서 존경받을 뿐 아니라 청나라 사람도 공경하고 복종하니 문장은 餘事일 뿐이다. 내가 그를 말할 때에 故相이 라고 하지 않고 先正이라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지난날 致祭文에서 “그의 문장은 韓愈와 曾鞏이요,그의 학문은 濂洛이다.”라고 한 것은 도학과 문장을 가리켜 말한 것이고,“동해의 물과 西山의 고사리, 잔 들어 제향하니 맑은 모습 이와 같도다.”라고 한 것은 절의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정조(正祖)가 청음을 가리켜 한 말이다.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은 선원 김상용의 넷째 아우다. 어려서는 주로 서울 장의동(장동)에서 살았으며, 유연당 김대현(金大賢)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히고, 윤근수의 문하에서 경사(經史)를 익혔다. 1636년에는 공조판서, 대제학, 예조판서, 대사헌, 이조판서를 거쳐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예조판서로 청과 화의의 부당함을 주장하고, 1637년 1월에는 이조판서 정온과 함께 자결을 시도하였으나 자손들의 구조로 살아났다. 주화파와 주전파로 조정이 대립할 때 주전파의 수장으로 지목을 받아 결국 1640년에 목에 철쇄를 차고 결박당한 채 심양에 까지 끌려갔다가 1645년 초 세자의 귀국 편으로 되돌아왔다.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는 순조와 김조순 딸, 헌종과 金祖根의 딸, 철종과 김문근의 딸이 국혼을 맺으면서 이루어진다. 부마를 비롯하여 영의정8명(김수향.김수홍.김창집.김좌근.김홍근.김병서.김병학.김병국), 좌의정4명(김상헌.김이소.김홍근.김병덕), 우의정3명(김상용.김이교.김달순)과
대제학7명, 묘정배향 6명(김상헌,김수향,김창집,김이교,김조순,김수근), 시호를 받은 인물이 49명. 판서가 51명이다.
삼구정에 올라 그들의 영화를 생각하니 무상하다는 생각을 저버릴 수 없었다. 세월은 변했지만 소산마을 사람들은 명문가의 후손으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삼구정의 거북바위도 여전히 제 자리에서 마을을 수호하고 있었다.
安東金氏 -素山마을
풍산에서 하회로 가는 길목에는 코스모스가 하늘거리고, 잘 익은 벼가 황금들판을 이루고 있었다. 청나라를 멀리 하겠다는 청음의 절의를 상징하는 청원루(淸遠樓)와 마을 입구에 있는 삼구정(三龜亭)은 넓은 풍산들을 바라보고 의젓이 자리 잡고 있었다. 소산마을은 본래 금산촌(金山村)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시미마’로 불린다. ‘쇠뫼’가 ‘시미’로 변형된 것이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청음 김상헌이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갈 때 지은 시조비와 삼당 김영 선생의 시조비가 반겨준다.
풍산에는 하회의 풍산류씨, 가일의 안동권씨, 오미의 풍산김씨, 소산의 안동김씨 등 반촌을 형성하고 누대 명인달사를 배출하면서 명가로서의 이름을 떨친 600여년 역사를 가진 명문가들이 많다. 그러나 소산마을은 그 어떤 마을보다 역사가 오래 되었으며, 김계권, 김계행, 삼당 김영, 청음 김상헌과 같은 명유를 배출한 유서 깊은 마을이다. 더구나 김상용과 김상헌 형제의 행적은 임진·병자 양란으로 인해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국가의 정체성을 재정립하고 당의 시대정신을 선도하여 왔으니 세도정치로 인한 금관자 서 말은 그만 두고라도 명가 중의 명가라고 할 수 있다.
안동김씨는 태사공 김선평(金宣平)을 시조로 하는 新안동김씨(後안동김씨)와 신라 경순왕의 손자인 김숙승을 시조로 하는 舊안동김씨(先안동김씨)가 있다. 이 두 가문은 안동의 대표적인 명문가로 같은 관향을 쓰고 있으나,시조도 다를 뿐만아니라 통혼도 하는 사이이다. 소산마을은 흔히 장동김씨로 널리 알려진 신안동김씨 마을이다.
신안동김씨 시조는 김선평(金宣平)은 신라말 고창(지금의 안동)성주를 지내다가 태조 왕건을 도와 병산전투에서 견훤군을 물리치고 태사(太師) 작위를 받은 인물로 안동권씨 시조 권태사(權幸), 안동장씨 시조 장태사(張吉)와 더불어 삼태사로 불린다. 안동김씨가 소산에 자리 잡은 것은 9세 김삼근(金三近) 대에 와서다. 김삼근은 지금의 풍산장터 부근 불정촌(佛頂村)에서 살다가 소산으로 옮겨와 소산 입향조가 되었다. 그러나 김삼근의 아들 김계권(金係權)이 한성판윤, 김계행(金係行)이 도승지, 대사간을 지내면서 중앙정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으며 서울 장의동에 터전을 마련하여 훗날 장동김씨 터전을 마련하였다. 김계권의 아들 오형제, 즉 학조대사와 영전(永銓), 영균(永勻), 영추(永錘), 영수(永銖)에 의해 신안동김씨는 문호가 크게 확장되었고, 장령공 영수(永銖)의 아들 김영(金瑛)과 김번(金璠)이 중종조에 나란히 문과에 합격하여 다시 중앙 정계로 진출하였으며, 김번(金璠)의 증손 선원 김상용과 청음 김상헌 형제가 나란히 정승에 올라 삼한벌족의 명성을 얻게 되었다. 대체로 김영의 후손들은 소산을 근거지로 오늘날까지 명문가를 이루고 살아가고 있으며, 김번의 후손은 서울 장동과 경기도 양주 석실을 근거로 하여 살아가고 있다고 하겠다.
김상용의 자는 경택(景擇), 호는 선원(仙源) 또는 풍계(楓溪)이며, 시호는문충(文忠)이다. 부친은 증 영의정 김극효(金克孝:1542-1618)이며 모친은 좌의정 정유길(鄭惟吉)의 따님이다. 67세인 1627년(인조5)에 예조판서에 임명되고, 2월 정묘호란으로 왕이 강화도로 피난하게 될 때, 유도대장의 직책을 맡았다. 종묘의 신주를 모시고 세자빈 강씨, 원손, 봉림대군 등이 강화도로 피난을 가고 미쳐 따라 가지 못한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였다. 적의 선봉이 성밖에 도착하여 남문에 오르고 점차 적병이 사방을 둘러싸자 사람들이 선원에게 피할 것을 권했으나 ‘해지는 강가에서, 나는 힘이 없으니 어쩔 수가 없구나(日暮江頭,臣力無何)’라는 유필을 남기고 화약상자에 걸터앉아 화약에 불을 질러 분사(焚死)하고 말았다.
淸陰 金尙憲은 바른 도학과 높은 절의로 우리나라에서 존경받을 뿐 아니라 청나라 사람도 공경하고 복종하니 문장은 餘事일 뿐이다. 내가 그를 말할 때에 故相이 라고 하지 않고 先正이라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지난날 致祭文에서 “그의 문장은 韓愈와 曾鞏이요,그의 학문은 濂洛이다.”라고 한 것은 도학과 문장을 가리켜 말한 것이고,“동해의 물과 西山의 고사리, 잔 들어 제향하니 맑은 모습 이와 같도다.”라고 한 것은 절의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정조(正祖)가 청음을 가리켜 한 말이다.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은 선원 김상용의 넷째 아우다. 어려서는 주로 서울 장의동(장동)에서 살았으며, 유연당 김대현(金大賢)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히고, 윤근수의 문하에서 경사(經史)를 익혔다. 1636년에는 공조판서, 대제학, 예조판서, 대사헌, 이조판서를 거쳐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예조판서로 청과 화의의 부당함을 주장하고, 1637년 1월에는 이조판서 정온과 함께 자결을 시도하였으나 자손들의 구조로 살아났다. 주화파와 주전파로 조정이 대립할 때 주전파의 수장으로 지목을 받아 결국 1640년에 목에 철쇄를 차고 결박당한 채 심양에 까지 끌려갔다가 1645년 초 세자의 귀국 편으로 되돌아왔다.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는 순조와 김조순 딸, 헌종과 金祖根의 딸, 철종과 김문근의 딸이 국혼을 맺으면서 이루어진다. 부마를 비롯하여 영의정8명(김수향.김수홍.김창집.김좌근.김홍근.김병서.김병학.김병국), 좌의정4명(김상헌.김이소.김홍근.김병덕), 우의정3명(김상용.김이교.김달순)과
대제학7명, 묘정배향 6명(김상헌,김수향,김창집,김이교,김조순,김수근), 시호를 받은 인물이 49명. 판서가 51명이다.
삼구정에 올라 그들의 영화를 생각하니 무상하다는 생각을 저버릴 수 없었다. 세월은 변했지만 소산마을 사람들은 명문가의 후손으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삼구정의 거북바위도 여전히 제 자리에서 마을을 수호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