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가를 찾아서
광주이씨-매원마을, 돌밭마을
칠곡군 왜관읍의 매원(梅院), 돌밭(石田), 지천면의 웃갓(上枝)은 광주이씨 수백 가구가 집성촌을 이루고 살아온 마을이다. 광주이씨는 신라 내물왕 때 내사령을 지낸 이자성을 시조로 하며, 고려 태조의 미움을 받아 정착한 경기도 광주(廣州)를 관향으로 하고 있다. 고려 말에 이당(李唐)의 아들 5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한 이후 가세가 번성하여 맏아들 둔촌 이집(李集 1327~1387)의 아들 5형제가 출사하여 이지직은 관찰사를 역임하고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이지강은 의정부 참찬 겸 사헌부 대사헌, 이지유는 성주목사를 지냈다.
조선 성종 때 와서 극(克)자 항렬을 쓰는 종반간 8명이 세칭 팔극조정(八克朝廷)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권세를 휘두름으로써 가문의 부침(浮沈)의 빌미가 시작되어 갑자사화 등 사화를 겪으면서 일족 30여명이 참화를 당하는 화를 겪기도 하였다. 영의정에 오른 동고 이준경과 한음 이덕형도 광주이씨이다.
서울과 근기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던 광주이씨가 성주·칠곡 지역에 입향한 것은 둔촌 이집의 증손 좌통례 이극견이 아들 이지(李摯)를 책방도령으로 성주로 데리고 옴으로 시작되었다. 칠곡에 세거하는 광주이씨 가문은 형조참의, 관찰사 이지직(李之直), 예조참판 이예손(李禮孫), 좌통례(左通禮) 이극견(李克堅), 승사랑(承仕郞) 이지(李摯)로 이어지는 가문이다. 이지(李摯)는 칠곡에서 영천최씨 최하(崔河)의 따님과 결혼하고 웃갓(上枝)에서 살다가 매원으로 이주하였으며, 증손인 석담 이윤우(李潤雨)와 이윤우의 두 아들 이도장(李道長), 이도장(李道章)도 웃갓에서 매원으로 이거하였다. 이윤우의 맏아들 이도장(李道長)은 5형제를 두었는데, 장자(長子) 이원정(李元禎)은 처향인 돌밭(石田)에 정착하게 되고, 차자(次子) 이원록(李元祿)은 매원에, 이원례는 봉화, 이원지는 상지, 이원진은 낙산에 자리 잡았다.
광주이씨 칠곡문중은 인조 연간 석담 이윤우(李潤雨)를 필두로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이윤우→ 이도장 → 이원정 → 이담명․이한명 등으로 이어지는 4대를 지나면서 영남남인을 대표하는 가문으로서의 부상하게 되었다. 사실 임란 이후 영남출신으로 정승에 오른 사람은 서애 류성룡, 낙파 류후조, 내암 정인홍 뿐이었다. 이조 판서에 오른 인물도 우복 정경세, 귀암 이원정, 갈암 이현일에 불과하다. 영남을 서인들의 치세에 철저하게 외면을 당했음을 시사한다.
석담(石潭) 이윤우(李潤雨)는 웃갓에서 태어났으며, 한강문하에 나아가 선조 39년(1606)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승정원 주서를 시작으로 관직에 나아갔으며, 사관으로서 정인홍(鄭仁弘)의 비위 사실을 직서하다 탄핵을 받아 사퇴하기도 하였으나 벼슬이 담양부사, 공조 참의에 이르렀다. 다산 정약용이 택리지 서문에서 ‘광주이씨는 석전을 받들어 돌밭을 차지했다’고 했을 정도로 영남남인의 대표적인 인물이 되었으며 ‘한강고제’로 추앙을 받았다.
감호 이도장(1607-1677)은 정구(鄭逑)와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경사를 깊이 연구하고 문장이 뛰어난 분이었다. 그러나 병자호란을 겪은 뒤에는 벼슬에 뜻이 없어 과거를 보지 않았다. 1649년(인조 27) 향천(鄕薦)으로 성현도찰방(省峴道察訪)이 되어서는 선정을 베풀었으며 사양서원(泗陽書院)을 세워 후학을 교육하였다.
귀암 이원정(1622-1680)은 동래부사, 양주목사, 대사간, 대사헌을 역임하고 1679년 이조판서에 올랐으나 경신환국으로 삭탈관직이 되었으며, 허적의 서자 허견의 역모사건으로 확대되어 초산으로 유배를 갔다가 정원로의 옥사사건으로 친국(親鞫) 국청에 불려와 형벌을 받다가 장을 맞고 돌아가셨다. 10년후 기사환국으로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나 다시 갑술환국으로 관직이 추탁되었다가 고종 때 와서야 비로소 제대로 평가를 받아 문익(文翼)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귀암은 당쟁의 최대 희생자였다.
귀암의 아들 정재 이담명(李聃命, 1646~1701)은 미수 허목(許穆), 백호 윤휴(尹鑴)의 문인이었다. 1670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이후 홍주목사, 승지 등을 지내다가 경신환국으로 파직되었다. 이때 초산으로 유배되는 아버지 이원정을 따라 갔다가 소환되어 아버지 이원정의 장살을 목격하고, 9년간 부친의 피 묻은 적삼을 입고 다녔다고 한다. 그 뒤 기사환국으로 복직되어 형조참의, 우승지, 전라도관찰사, 경상도관찰사, 대사간, 대사헌 등을 역임하고 이조참판(吏曹參判), 부호군에 이르렀다. 예송 때에는 서인(西人) 송시열, 송준길의 예론을 맹공격하기도 했다. 경상도관찰사로 선정을 베풀고, 백성들을 구제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광주이씨는 청백리 5명, 문형 3명, 상신 5명을 배출한 우리나라 최고의 명문가라고 할 수 있지만 영남에 입향한 이후 칠곡의 매원, 돌밭, 웃갓을 중심으로 하는 문중 또한 영남에서 가장 대표적인 명문가라고 할 수 있다. 석담 이윤우, 귀암 이원정, 정재 이담명을 비롯한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여 노론과 대척점에서 서서 영남 남인의 올곧은 지향을 보여주었다고 하겠다.
광주이씨-매원마을, 돌밭마을
칠곡군 왜관읍의 매원(梅院), 돌밭(石田), 지천면의 웃갓(上枝)은 광주이씨 수백 가구가 집성촌을 이루고 살아온 마을이다. 광주이씨는 신라 내물왕 때 내사령을 지낸 이자성을 시조로 하며, 고려 태조의 미움을 받아 정착한 경기도 광주(廣州)를 관향으로 하고 있다. 고려 말에 이당(李唐)의 아들 5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한 이후 가세가 번성하여 맏아들 둔촌 이집(李集 1327~1387)의 아들 5형제가 출사하여 이지직은 관찰사를 역임하고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이지강은 의정부 참찬 겸 사헌부 대사헌, 이지유는 성주목사를 지냈다.
조선 성종 때 와서 극(克)자 항렬을 쓰는 종반간 8명이 세칭 팔극조정(八克朝廷)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권세를 휘두름으로써 가문의 부침(浮沈)의 빌미가 시작되어 갑자사화 등 사화를 겪으면서 일족 30여명이 참화를 당하는 화를 겪기도 하였다. 영의정에 오른 동고 이준경과 한음 이덕형도 광주이씨이다.
서울과 근기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던 광주이씨가 성주·칠곡 지역에 입향한 것은 둔촌 이집의 증손 좌통례 이극견이 아들 이지(李摯)를 책방도령으로 성주로 데리고 옴으로 시작되었다. 칠곡에 세거하는 광주이씨 가문은 형조참의, 관찰사 이지직(李之直), 예조참판 이예손(李禮孫), 좌통례(左通禮) 이극견(李克堅), 승사랑(承仕郞) 이지(李摯)로 이어지는 가문이다. 이지(李摯)는 칠곡에서 영천최씨 최하(崔河)의 따님과 결혼하고 웃갓(上枝)에서 살다가 매원으로 이주하였으며, 증손인 석담 이윤우(李潤雨)와 이윤우의 두 아들 이도장(李道長), 이도장(李道章)도 웃갓에서 매원으로 이거하였다. 이윤우의 맏아들 이도장(李道長)은 5형제를 두었는데, 장자(長子) 이원정(李元禎)은 처향인 돌밭(石田)에 정착하게 되고, 차자(次子) 이원록(李元祿)은 매원에, 이원례는 봉화, 이원지는 상지, 이원진은 낙산에 자리 잡았다.
광주이씨 칠곡문중은 인조 연간 석담 이윤우(李潤雨)를 필두로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이윤우→ 이도장 → 이원정 → 이담명․이한명 등으로 이어지는 4대를 지나면서 영남남인을 대표하는 가문으로서의 부상하게 되었다. 사실 임란 이후 영남출신으로 정승에 오른 사람은 서애 류성룡, 낙파 류후조, 내암 정인홍 뿐이었다. 이조 판서에 오른 인물도 우복 정경세, 귀암 이원정, 갈암 이현일에 불과하다. 영남을 서인들의 치세에 철저하게 외면을 당했음을 시사한다.
석담(石潭) 이윤우(李潤雨)는 웃갓에서 태어났으며, 한강문하에 나아가 선조 39년(1606)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승정원 주서를 시작으로 관직에 나아갔으며, 사관으로서 정인홍(鄭仁弘)의 비위 사실을 직서하다 탄핵을 받아 사퇴하기도 하였으나 벼슬이 담양부사, 공조 참의에 이르렀다. 다산 정약용이 택리지 서문에서 ‘광주이씨는 석전을 받들어 돌밭을 차지했다’고 했을 정도로 영남남인의 대표적인 인물이 되었으며 ‘한강고제’로 추앙을 받았다.
감호 이도장(1607-1677)은 정구(鄭逑)와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경사를 깊이 연구하고 문장이 뛰어난 분이었다. 그러나 병자호란을 겪은 뒤에는 벼슬에 뜻이 없어 과거를 보지 않았다. 1649년(인조 27) 향천(鄕薦)으로 성현도찰방(省峴道察訪)이 되어서는 선정을 베풀었으며 사양서원(泗陽書院)을 세워 후학을 교육하였다.
귀암 이원정(1622-1680)은 동래부사, 양주목사, 대사간, 대사헌을 역임하고 1679년 이조판서에 올랐으나 경신환국으로 삭탈관직이 되었으며, 허적의 서자 허견의 역모사건으로 확대되어 초산으로 유배를 갔다가 정원로의 옥사사건으로 친국(親鞫) 국청에 불려와 형벌을 받다가 장을 맞고 돌아가셨다. 10년후 기사환국으로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나 다시 갑술환국으로 관직이 추탁되었다가 고종 때 와서야 비로소 제대로 평가를 받아 문익(文翼)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귀암은 당쟁의 최대 희생자였다.
귀암의 아들 정재 이담명(李聃命, 1646~1701)은 미수 허목(許穆), 백호 윤휴(尹鑴)의 문인이었다. 1670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이후 홍주목사, 승지 등을 지내다가 경신환국으로 파직되었다. 이때 초산으로 유배되는 아버지 이원정을 따라 갔다가 소환되어 아버지 이원정의 장살을 목격하고, 9년간 부친의 피 묻은 적삼을 입고 다녔다고 한다. 그 뒤 기사환국으로 복직되어 형조참의, 우승지, 전라도관찰사, 경상도관찰사, 대사간, 대사헌 등을 역임하고 이조참판(吏曹參判), 부호군에 이르렀다. 예송 때에는 서인(西人) 송시열, 송준길의 예론을 맹공격하기도 했다. 경상도관찰사로 선정을 베풀고, 백성들을 구제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광주이씨는 청백리 5명, 문형 3명, 상신 5명을 배출한 우리나라 최고의 명문가라고 할 수 있지만 영남에 입향한 이후 칠곡의 매원, 돌밭, 웃갓을 중심으로 하는 문중 또한 영남에서 가장 대표적인 명문가라고 할 수 있다. 석담 이윤우, 귀암 이원정, 정재 이담명을 비롯한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여 노론과 대척점에서 서서 영남 남인의 올곧은 지향을 보여주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