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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가를 찾아- 선산김씨 들성마을
23/02/17 11:26:28 김정현 조회 1918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선산은 산천이 맑고 밝아 상주보다 수려하다고 전제하면서,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 인재의 반은 선산에 있다.”고 하였다. 물론 이 말은 전래된 속담이기는 하지만 그만큼 선산지역은 조선초 성리학의 도통을 전수하고 계승한 곳으로 중요하다는 말이 된다.
우리 나라의 성리학은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 강호 김숙자, 점필재 김종직. 한훤당 김굉필로 이어진다. 한훤당 김굉필에서 회재 이언적, 퇴계 이황으로 이어지는 학맥과는 달리 선산지역에서는 한훤당에서 신당 정붕, 송당 박영을 거쳐 김취성⋅박운 및 김취문으로 이어지는 선산사림의 도학적 계보가 있다.
선산김씨가 선산에 입향한 것은 화의군 김기(和義君 金起)에 의해서였다. 그리고 들성에 입향한 것은 김기의 현손 김광좌(金匡佐 1466∼1545)에 의해서였다. 김광좌는 충무위(忠武衛)의 벼슬을 지내고 나중에 이조참판에 증직되었으며, 당시 들성에 세거하던 선산임씨 상호군 임무(上護軍 林珷)의 사위였다. 임무에게는 아들이 없었기에 김광좌는 처부모을 모시기 위해 아들 형제를 거느리고 들성에 입향하였다. 김광좌의 아들 6형제(김취성, 김취기, 김취연, 김취련, 김취문, 김취빈)는 모두 현달하였으며, 그 중 김취성과 김취문은 송당 박영의 문하에 들어가 선산사림의 도학을 이은 훌륭한 분들로 학문적, 정치적으로 크게 성취를 이루어 들성에 세거하는 선산김씨의 현조(顯祖)가 된다.
김취문은 29세 때인 1537년(중종 32) 別試文科에 급제한 이래 교서관정자를 시작으로 1568년 (선조 1) 司諫院大司諫에 이르기까지 內⋅外의 관직을 두루 거쳤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강직하여 벼슬길에 나가서도 권세가에게 아부하지 않았으며, 이로 인하여 자주 외직으로 밀려났다. 외직에 있으면서도 청렴결백하여 백성들을 침탈함이 전혀 없어 성균관 사성으로 있을 때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또한, 지방 수령이 되어서는 시정(時政)에 대한 건의사항을 왕에게 자주 주달하였다. 실록에는 잠암 김의정과 더불어 도의를 성취하신 분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증 이조 판서 김취문(金就文)의 시호를 문간(文簡)이라 정하였다, 김취문의 인물됨을 알 수 있는 자료를 살펴보면
 
선조는 사제문에서 “생각건대 혼령은 하늘에 있는 별의 정기를 받아 높은 산에서 내려온 신령이었다. 가슴 속에는 남을 포용하는 도량을 갖추었고 자질과 성품은 단아하면서도 순수했다. 사람을 대할 때에는 옥과 같이 따스한 온기를 발하여 편안한 가운데 숙연하게 하는 자상한 면이 있었다.”고 하였으며, 퇴계는 아들 준에 쓴 편지에서 “올 때에 청송(靑松)을 지나오게 되느냐? 청송 부사 구암(久菴) 김취문(金就文) 는 보통 사람이 아니어서, 내가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사람이니, 너는 모름지기 조심해서 찾아뵈어라. 지나는 곳마다 모두 삼가야 하겠지만 이 부(府)는 더욱 조심하라.” 하였다.
 
들성이 성세를 이룬 명문가가 된 것은 김취문의 후손들에 의해서이다. 그들은 웃골, 문성동, 원당골, 상원당, 지내, 중동, 황산동 등 들성9동에 산재하여 500년 세거 문중을 이루고 있다.
구암의 장자 김종무는 안동 하회마을의 입암 류중영의 사위가 되어 겸암 류운룡(인동현감 역임), 서애 류성룡이 그의 처남이다. 김종무는 임진왜란을 맞아 상주 북천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했다. 차자 김종유는 우계 성혼의 제자가 되었다.
이후 들성에서는 문간공파를 비롯한 각 파에서 수많은 문과 인물급제자를 배출한다. 김취정, 김취문, 김천영, 김탁, 김양선, 김하연, 김하량, 김홍수, 김원섭, 김몽화, 김진구, 김성진, 김희태, 김석모, 김병용, 김하용 바로 문과급제자이며 그중 문간공파 급제자가 6명으로 가장 많다.
들성에는 선산김씨의 김광좌의 점현재(店峴齋), 김취문의 대월재(對越齋), 김광좌와 아들 육형제의 서산세덕사(西山世德祠), 김종무의 정려각과 충렬사, 김경의 탄옹재, 김현건의 추모재, 김몽화의 칠암재 등의 재사와 정자 등이 있으며 낙봉서원과 남강서원을 설립하여 선조들을 추모하고 있다.
낙봉서원은 1646년(인조 24)에 세워졌으며, 강호 김숙자, 진락당 김취성, 용암 박운, 구암 김취문, 두곡 고응척 선생을 모시고 있으며, 1792년에 설립된 남강서원에는 김취문의 장자 김종무(1548∼1592), 그의 차자 浴潭 김공(1581∼1641), 陽灘 김양(1574∼1644)과 灘翁 김경(1583∼1637), 臥遊堂 朴晋慶(1581∼1665)이 함께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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